"엄마, 뭔 물을 그렇게 많이 붓는당가?"

[설밑 시골풍경 2]짚을 태운 재로 명절 때마다 시루에 콩나물 길러

등록 2004.01.19 10:21수정 2004.01.1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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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용도 시루에 평소에는 콩나물 기르고 대사 치를 때는 떡하고 백중 때는 빵찌고...
다용도 시루에 평소에는 콩나물 기르고 대사 치를 때는 떡하고 백중 때는 빵찌고...김규환
"아야 규환아 머하냐?"
"왜라우? 방학 숙제 허는디요."
"얼렁 나와봐라."
"금방 나가요."


맑게 갠 오후 어머니는 행랑채에 잘 말려둔 짚 다발 한 단을 가져오셨다.

"왜 그요?"
"잉 오늘은 콩지름(콩길음, 콩나물의 사투리)을 놓아야겠다."
"시방 해도 늦지 않겠는가?"
"아직 엿새 남았응께 괜찮을 거시여."
"너는 여그서 짚다발을 꼬실라라."
"걱정 마싯쇼."

마당을 일부 쓸고 짚 다발을 풀어 성냥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짚불에 고기라도 구워 먹으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볏짚이란 게 첫 불만 화려할 뿐 이내 사그라 든다. 긴 부지땅(부지깽이)으로 살살 흩어 놓으면 그 발갛던 불은 이내 짚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채 까만 재로 바뀐다.

여기에 담긴 물을 휘휘 둘러 조심히 부어줬습니다.
여기에 담긴 물을 휘휘 둘러 조심히 부어줬습니다.김규환
"엄마 다 식었는디요."
"시루 들고 갈텡께 날라가지 않게 하거라."
"예."

슬슬 모아 한 군데 뭉쳐 놓으니 도망가지 않고 서로 엉겨 있다. 어머니는 미리 불려 놓은 작은 진저리콩(쥐눈이콩의 사투리. 전주식 콩나물국밥의 으뜸 재료) 두 되와 질그릇 시루를 갖고 오셨다.


바닥에 뚫린 구멍엔 솔가지를 꺾어 빠지지 않게 대충 막으시고 살짝 닿자마자 "사사삭" 맑고 시원한 소리를 내는 까만 재를 한층 올린다. 위엔 불린 콩을 골고루 뿌려 준다. 또 한번 재로 덮고 위에 콩을 뿌린다. 다섯 층을 조심조심 올리니 콩이 바닥이 났다. 이젠 나머지 재로 위를 덮으면 된다.

주변을 정리하고 어머니를 따라가 봤다. 장독대 주변에 시루를 옮기시고 물을 한 동이 가져다가 바가지로 물을 떠서 살살 골고루 뿌려준다. 물이 쭉 빠지자 1시간 여 지나고서도 또 한번 물을 길러다가 부어준다.


"엄마 왜 이렇게 물을 많이 뿌린당가?"
"잿물을 다 빼야 되는 것이여. 재도 독이 있응께."

해질녘 방안 윗목에 나무를 잘라 만든 'Y'자형 받침대에 올려놓는다. 이제 물기가 떨어질 때마다 하루 세 번씩 물만 주면 그믐 날 이전까지는 노란 콩나물이 쑥쑥 자랄 것이다. 날마다 잊지 않고 애지중지 기르면 이번 설에도 반찬 걱정 없이 날 수 있다. 무치고 국 끓이고 잡탕 만들어 먹으려면 한 시루는 족히 들어가니 말이다.

이렇게 어머니는 제사나 명절이 돌아오면 미리 콩나물을 직접 기르셨다. 자급자족 생활의 실천이다. 나물이라도 걸게 차려야 했던 지난날 우리 어머니들은 그렇게 부지런하시고 늘 바빴다.

오늘도 그 콩나물이 그립지만 감히 나는 엄두를 못 낸다. 도시에서 사는 터라 콩이 있던 들 어찌 어머니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 볼 수 있겠는가. 당장 시루도 없고 짚 다발 태울 데도 없다. 뿐만이 아니다. 나에겐 그 정성마저 없으니 그립던 옛날이나 씹어 보련다.

콩나물을 우리 동네에선 콩지름이라 했습니다. 콩지름이라하면 콩 식용유가 아닌 콩을 기른 것이니 바로 콩길음이라 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콩나물을 우리 동네에선 콩지름이라 했습니다. 콩지름이라하면 콩 식용유가 아닌 콩을 기른 것이니 바로 콩길음이라 하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김규환

덧붙이는 글 | 이번에 내려가면 기어코 콩나물 시루에 기른 콩지름-콩나물을 찍어 오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번에 내려가면 기어코 콩나물 시루에 기른 콩지름-콩나물을 찍어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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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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