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빈이 자전거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렸습니다.느릿느릿 박철
겨울이 점점 깊어져 갑니다. 낮의 길이는 짧고 대신 밤이 깁니다. 모처럼 시골에서도 한가로운 삶의 여유가 찾아왔습니다. 밤늦게까지 TV를 보아도 괜찮고, 아침에 조금 늦잠을 잤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김장도 잘 익었겠다 저녁밥을 일찍 해먹고 동네 아낙들은 이웃집으로 마실을 갑니다. 마실도 일종의 품앗이 같습니다. 이야기거리도 다양하지요.
처음에는 남편 이야기, 애들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한참 떠들다보면 뱃속이 출출하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먹는 이야기가 줄줄이 엮어집니다. 처녀 적 선보려고 다방에 갔다가 처음 먹어 본 커피 이야기, 시집 와서 동짓날 시어머니가 팥죽을 쑤었는데 자기한테는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이 식구들이 몽땅 먹어버려 약이 오른 이야기, 애 갖고 숭어회가 먹고 싶어서 남편한테 회 타령을 한 이야기, 시어머니 몰래 한밤중 부엌에 들어가 밥 비며먹다 걸린 이야기 등 순전히 먹는 이야기뿐입니다.
먹는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먹을 게 나올 차례입니다. 그러면 찐 고구마도 나오고, 과자 부스러기도 나오고, 어떤 때는 비빔국수도 나옵니다. 살이 쪄서 고민인데 하면서도 다 먹습니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입가심으로 밭에 묻어둔 무나 순무를 캐다가 깎아 먹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찬 무를 깎아 먹는 맛은 안 먹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 나의 유년 시절, 흐릿하지만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강원도 화천 논미리, 이웃 친척집 사랑방에 더벅머리 총각들이 가득 모여 한 쪽에서는 새끼를 꼬고 한 쪽에서는 윷놀이나 화투를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형들이 주고 받는 걸쭉한 농 짓거리에 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