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증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들을 기억하라 ⑥] 인터뷰 - 윤미향 정대협 사무총장

등록 2004.02.02 22:58수정 2004.02.03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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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선 서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한 허름한 건물과 마주친다. '기사연(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빌딩'이라는 현판을 내건 이 건물 3층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아담한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 거예요. 처음엔 남의 사무실 귀퉁이에서 달랑 책상, 전화기만 놓고 시작했는 걸요."

윤미향 정대협 사무총장은 '옛날과 비교하면 이 정도의 환경은 엄청난 호사'라며 웃는다. 정대협 발족 초기부터 실무자로 활동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어온 윤 사무총장에게는 간사들의 건강을 해칠 만큼 공기가 탁하거나 습하지 않으며, 손님이 오면 차 한잔 낼 정도는 되는 이 사무실이 '엄청난 호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운동의 동료였던 고(故) 강덕경 할머니 사진 곁에 선 윤미향 사무총장.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운동의 동료였던 고(故) 강덕경 할머니 사진 곁에 선 윤미향 사무총장.송민성
침묵에 대한 충격

"어렸을 때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어요. 제 고향(경남 남해)에도 정신대에 나가지 않으려고 결혼을 서두른 여자들이 많았거든요."

그때는 정신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들이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끌려간 '위안부'였음을 안 것은 좀 더 자란 후의 일이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충격이었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침묵이 두 번째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윤 사무총장을 정대협으로 이끌었다.

"할머니들과 신뢰를 쌓는 일이 가장 중요했죠. 90년대 초반만 해도 할머니들은 얼굴이나 이름을 드러내길 극도로 꺼리셨어요.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하시고. 그런 할머니들의 모습 자체가 '위안부'의 후유증이라고 보고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이 생존자로 서기까지

방법은 딱 한가지,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할머니들과 끊임 없이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간호를 맡았다. 그렇게 그들 가까이에서 할머니들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설득했다. 점차 할머니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정대협이 적어도 당신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인권캠프나 나들이를 가면 할머니들끼리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세요. 서로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치유하는 거예요."

이제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순결을 잃은 죄인'이 아니라 피해자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의 울분과 생존자로서의 정당함을 당당히 외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수요집회를 그만두겠는가?"

할머니들이 받은 엽서들과 교육관의 증언판
할머니들이 받은 엽서들과 교육관의 증언판송민성
"오는 2월 4일 594차 수요집회가 열립니다. 벌써 12년째 접어들었지만 매주 부담스럽고 쉽지 않습니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일본 총리의 방한에 항의하며 시작된 수요집회는 한 가지 이슈에 관한 세계 최장기 집회라는 기록을 갱신하며 계속되고 있다.

"주관단체를 찾으려고 열 단체쯤 전화를 걸면 한 단체 정도가 응하는 식이죠. 수요집회가 오래 되다보니 식상하게 인식되는 부분도 있구요."

3·1절, 광복절에만 몰려오는 언론과 시민들, 한여름·겨울의 더위와 추위 등 참가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물론 그때라도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사람들이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날들이 지나가면 그뿐이에요. 또 다시 무덤덤해지는 거죠."

수요집회는 이같은 '냄비 근성'을 깨보고자 하는 정대협과 할머니들의 절박한 실천인 셈이다. 그는 수요집회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는 93년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한 이후 어떠한 변화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라는 민간기금을 조성해 법적인 인정과 배상을 피하고 문제를 무마시키려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수요집회를 그만두겠어요? 한 사람이 나와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역사의 증인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수요집회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요집회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송민성
윤 사무총장은 앞으로의 '위안부' 문제는 끈기와 인내의 싸움이라고 규정한다.

"매년 할머니들이 돌아가시죠. 정대협은 언제나 인력난과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구요. '위안부'에 대해 증언하고 교육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죠."

그는 "역사의 증인들이 다 사라지고 난 후에도 증언과 교육을 계속해줄 무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대협이 추진하고 있는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명예와 인권의 전당(임시 이름)' 건립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여기에는 '위안부'의 역사 자료,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전쟁과 인권 관련 자료 등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나중에 무얼 가지고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고 후세를 교육시킬 건가요?"

그는 평화와 인권기념관을 시에서 지어 관리하는 오사카시를 예로 들면서 "우리 나라는 왜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또한 윤 사무총장은 명예와 인권의 전당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 주는 매개체가 되리라고 기대한다.

"우리 세대에서 '위안부' 문제가 조속히 해결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고 이야기한다면 언젠가는 일본의 사과도 받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난 10여 년간 자신의 삶을 빈틈 없이 채운 것은 정대협이었노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윤 사무총장의 얼굴은 그래서 어둡지 않다. 어려움 속에서도 정대협과 할머니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해결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렇게 움직이다보면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달라질 거라고 믿는 거죠."

정대협의 교육관과 기념관

1999년 정대협이 전쟁으로 짓밟힌 여성 인권을 바로 세우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든 교육관은 기획교육과 방문교육 등을 통해 '위안부'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교육관에는 할머니들의 유품과 사진, 증언뿐만 아니라 '위안부'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다. 교육관을 방문하려면 정대협 홈페이지 www.k-comfortwomen.com에서 교육관 방문신청을 하면 된다.

한편 '명예와 인권의 전당'은 정대협을 중심으로 13년 이상 전개되어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성과를 계승발전시킨다는 데 큰 의의를 둔다. 정대협은 기념관 건립이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한편 현장성과 실천성을 겸비한 인권·평화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대협의 구성계획에 따르면 기념관은 △우리, 함께하다 △여성, 일어나다 △할머니, 기억하다 의 세가지 테마로 채워질 예정이다. '위안부'의 역사자료,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전쟁과 인권 관련 자료 등이 전시된다.

이를 위해 건립위원회(윤정옥·이효재 공동대표)가 조직되었고, 지난 18일 열린 기념관 사업 점화식에서는 황금주씨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기념관의 '씨앗자금'을 내놓았다.

기념관 건립 후원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후원자는 기념관에 영구히 이름을 보존한다. 자세한 문의는 02-365-4016, 정대협 홈페이지로 하면 된다.

후원계좌 조흥은행308-03-009542 (예금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 송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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