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갚지 못한 나의 어떤 빚

선 굵은 만년필로 쓴 대선배님의 편지를 받고

등록 2004.02.09 16:41수정 2004.02.10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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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거실 창에는 늘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가 하나 걸려 있습니다. 가지 끝에는 두 개의 까치둥지가 얹혀 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그 나뭇가지와 까치둥지를 통해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에는 아침부터 까치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더니 그날 귀한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 편지 때문에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 지금은 업계를 떠나 은퇴하신 분인데, 그 분이 만년필로 꼭꼭 눌러쓴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마치 기쁨을 배가시키기 위한 깜짝 파티(surprise party)처럼, 전화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애인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찾아온 편지였습니다.

제 이 메일 주소도 알고, 전화번호도 알고 있는데 잉크로 써서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갖다 넣는 복고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편지를 보낸다고 썼습니다. 느리게 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아내와 내 아이들에게도 그 편지를 보여주면서 아이처럼 들떠서 한참 자랑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분을 꿈에도 뵌 적이 없겠지만 그 분이 쓴 카피, 그 분이 만든 광고는 숱하게 보았습니다.

모르지요. 어쩌면 그 분이 만든 광고 때문에 몇 번이나 지갑을 열었는지도….


옛날에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님은 늘 자칭 '국보 교수'라고 떠들고 다니셨잖아요(그 분도, 그 분의 너스레도 그립군요). 이 분이야말로 국보급 카피라이터입니다. 제게는 그의 삶, 그의 존재 그 자체로 너무나도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입니다.

올해는 해마다 챙기던 연하장도 빼먹고 새해 인사 전화조차 드리지 못한 채 1월이 훌쩍 건너가고 있던 터에 저의 게으름을 일러주시고자 했음인지 생각지도 않았던 편지를 보내온 것입니다. 멋지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셈입니다. 황송함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술 한 잔 정도는 이쁘게 살 수 있으니 언제 우연히(?) 만나자'는 희망사항으로 편지는 끝나고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빚이 많은 사람이지만 저에게는 아직도 갚지 못한 빚이 하나 있습니다. 늘 '꼭 갚아야지. 갚아야지' 벼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갚지 못한 빚입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던 햇병아리 시절, 저에게 그 분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습니다. 행복하게도 저는 한 번만에 용안(?)을 우러러 뵐 수도 없었던 까마득한 원로 선배님들로부터 심심찮게 편지를 받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늘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담은 편지들이었습니다. 가까이 모시고 일 한번 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었는데…. 그저 서울 카피라이터 클럽이나 업계 모임 같은데서 몇 번 얼굴을 뵌 적이 있는 분들입니다.

너무 조심스럽고 어려워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우리끼리 한두 잔 홀짝거리다가 도망치듯이 빠져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편지를 받고 나면 너무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때 마다 마음 속으로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래 세월이 흐르다보면 나에게도 후배들이 생길 것이다. 내가 선배가 되었을 때, 그 때 나도 후배들에게 이런 격려의 편지를 꼭 보내야지. 그게 이 분들의 사랑을 가장 크게 앙갚음(?)하는 길이다. 나의 편지를 받은 그 후배는 오늘 나처럼 얼마나 행복해 하겠는가?'

그 이후 시간이 적잖게 흘러 이제 내게도 선배보다 후배가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도 '다음에, 다음에…' 그러면서 그 빚 갚기를 미루고 있는 차에 또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 분도 계십니다.

지금도 가끔 그 때 받았던 편지를 꺼내보곤 합니다. 선이 굵은 만년필로 꾹꾹 눌러 큼직큼직하게 쓴 편지들. 빛바랜 편지지에 기분 좋게 코끝을 파고드는 잉크 냄새도 좋지만 한 줄 한 줄 행간을 채우고 있는 후배 사랑의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 그 감동은 받아보지 않은 이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선배님의 편지를 받아들고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지금 그 때의 행복을 되새김질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을 최대한 연장하려고 바로 답장을 쓰지 않고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이번에는 꼭 후배에게 띄우는 편지와 그 선배님께 드리는 답장을 한꺼번에 우체통에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머지않아 봄소식을 가지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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