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열살 즈음부터 노래와 서서히 멀어진 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할 때는 노래를 부른다. 고속도로를 장시간 운전하며 서울이나 지방으로 출장갈 때 이 노래 저 노래 외워두었던 가사와 TV에 나왔던 가수들의 입모양을 기억해서 맘껏 불러보는 것이다.
우리말이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소리를 낸다면 그냥 노래로 통할지도 모를 것이란 우스운 생각과 더불어 내 소리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하는 궁금증도 간절히 생긴다. 나 자신도 못 듣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듣지 못하는 내 노래를 하나님은 싫어도 귀따갑게 들을 터란 생각에 때론 절로 고소를 금치 못하기도 한다.
여성과 장애의 이중 차별. 그 거센 바람속에서 견디는 꿋꿋한 솟대같이 살아가는 다양한 장애를 가진 벗들과 이 다음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될까? 하는 소망을 무심히 나눈 적이 있다.
지체장애로 달릴 수 없는 이는 운동선수를, 너무 여리디 여려 부서질것 같은 키 작은 아가씨는 무용수를 소망했다. 당연히 난 혼을 풀어 노래하는 가수라고 말했고 오토바이 사고로 팔이 불편한 아가씨는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다.
그 꿈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운동을 못 하지만 그림을 통해서 다양한 신체의 자유로운 표현을 하거나 멋진 무용수는 아니더라도 깜찍한 제스처나 마임으로 주위를 밝게 하는 것은 꿈으로 다가가는 과정 아닐까.
현생에 이루기 힘든 것을 다음 생에 꿈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한의 발로일 것이다.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닌데도 절로 생긴 신체의 부자유 때문에 이루어갈 수 없는 소망이 어찌 그 뿐이랴.
길을 잃더라도 여행을 하고 싶거나, 이혼을 여러 번 한다해도 한번쯤은 결혼해 보고 싶거나, 잘못되어 타락한다 하더라도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은 미지의 세상에 대한 동경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을까.
신체는 부자유스러울지라도 마음 안의 정서는 자유로운 심성을 가졌고 그래서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이성에 대한 꿈도 당연히 가졌지만 그것은 내놓고 표출할 수도 없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갖기 힘들다.
그래서 세상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하거나 또는 자신 안에 숨은 또 하나의 자신과 치열하게 사투를 하면서 솟대처럼 꿋꿋하게 하루를 살아가지만 아름다운 꿈은 계속 꾼다.
무용을 못 해도 깜짝 춤으로 주위를 웃게 하고 운동을 못 해도 그림에서 마음 대로 신체를 자유롭게 변형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현실로 풀 수 없는 꿈에 다가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내 노래의 색깔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난 노래를 한다. 불혹이 넘은 나이로 뒤늦게 배운 수화로 아름다운 손짓 노래를 연습하기도 한다. 또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생의 운전대를 잡고 삶의 길을 열어가면서 되도록 순리라는 음계를 지키고 우리 모두 행복하게 하는 화음이라는데 각별히 신경쓰면서 온 몸으로 실천하는 노래,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하늘과 땅이 듣는 노래를 오늘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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