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민주화운동과 <조선>의 왜곡보도

왕권 강화와 부패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공산화'로 매도

등록 2004.02.15 13:16수정 2004.02.1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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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산악인들이 많은 우리에게 네팔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에베레스트산을 비롯하여 험산준령들을 품고 있는 히말라야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밖에 우리는 네팔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니다. 히말라야말고는 관심도 별로 없다. 그런 나라에서 3박4일을 지내고 왔다. 그래도 네팔의 정치상황에 관한 가장 정확한 첫 기록이 아닌가 싶다.

정작 히말라야 설산은 구경도 못하고 나가르코트(해발 2,175m)의 에베레스트 전망대에서 일출만 겨우 볼 수 있었다. 당초 나가르코트에서 1박을 하기로 돼 있었으나 하필 그 날 총파업을 해 이동을 하지 못하고 카트만두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파업 다음날 일정상 새벽에 버스로 전망대로 이동하여 일출만 보고 와서 귀국 길에 올랐다.

네팔로 가기 전 2월 4일자 <조선일보> A15(국제)면의 톱기사가 네팔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네팔左派 왕정타도 격렬 시위’라는 제목으로 홍콩 특파원이 쓴 기사였다. ‘反軍 8년째 대치... 목표는 공산화’라는 부제도 곁들였다.

▷조선일보 기사 보기

<조선일보>는“네팔이 다시 큰 혼돈에 빠졌다"며 이는 "왕정 폐지와 공산화를 추구하는 좌파 정당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와 총파업 사태로 인한 것"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어디까지 사실에 부합할까?

<조선일보> 기사의 기조는 이것이다. 좌파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요구는 표면적 이유”이며 “목표는 왕정타도와 공산화”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합법 활동을 하는 좌파정당들 뿐 아니라 보수정당, 대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대다수 국민들이며, 왕정타도와 공산화를 목표로 무장투쟁을 하는 조직은 마오이스트들 뿐이다.

기사는 이것을 뒤섞어놓음으로써 마치 좌파정당들이 대학생 조직들까지 동원하여 민주화를 빙자한 공산정권 수립운동을 하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한 정황은 이렇다. 네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마침내 비렌드라 국왕으로 하여금 1990년 11월 신헌법을 공포하게 만들었다.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이다. 네팔 국민들은 그 이후 13년간을 ‘민주주의의 시기’라고 부른다. 이듬해(1991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네팔의회당이 하원의석 205석 가운데 110석을 획득하여 집권을 한다.

그러나 94년 11월의 총선에서는 어느 정당도 과반수 획득에 실패했다. 이 때 마르크스당과 레닌당이 마르크스레닌당으로 합당하여 과반수를 이룸으로써 집권을 한다. 99년 5월 총선에서는 다시 네팔의회당이 과반수를 획득한다. 그러나 최근 갸넨드라 국왕은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12년 동안 총리가 12번 바뀌는 정정 불안을 틈타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게 이번 시위의 직접적 원인이다.


또 있다. <조선일보>는 애매하게 묘사했지만 2001년 비렌드라 전 국왕 일가 살해사건의 전말에 대한 국민들의 의혹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 해 6월1일 왕궁의 만찬석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결혼에 반대하는 부모에게 앙심을 품고 총을 난사하여 모두 죽었다. 부상을 입은 왕세자가 왕위에 올랐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3일 만에 사망하고, 사건 당일 우연히(?) 만찬에 참석하지 않았던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조사위원회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발표를 그대로 믿는 국민들은 없다고 한다.

2월 11일자 <히말리얀 타임즈>에서 아난다 P. 스레스샤는 마오이스트의 봉기와 국왕의 권력 강화 시도의 원인을 지난 13년 간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벌어진 만연한 부패와 실정, 그 결과에 따른 사회불안과 불확실성, 혼란 등에서 찾았다. 사실 이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에서 네팔 국민들이 겪어야 할 비용일 것이다.

스레스샤는 “입헌군주제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국왕의 거듭된 보장에도 불구하고 정당들은 여전히 국왕의 그런 제스처를 막후에서 절대군주제를 재구축하려는 책략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 한다. 그는 ‘흑묘백묘론’을 거론하면서 누가 되든지 간에 지금의 난관을 극복하여 평화와 발전, 진정한 민주주의의 규범과 가치 등을 국민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조선일보>의 기사는 제3세계 혹은 비동맹권 국가들을 다루는 국제뉴스의 맹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 서방통신사들의 시각을 단순히 옮겨놓는 국제뉴스로 인하여 그 국가들 상호간의 몰이해와 편견을 심화하는 것이다.

사실 직접 겪은 네팔이라는 나라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민소득 200불 남짓에 국민들의 생활은 극도의 빈곤상태에 있었다. 집은 거의 폐가 수준이었으며, 굴러다니는 자동차는 거의 모두 고철 덩어리에 지독한 매연을 뿜어댔다. 거리를 걸을 때는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종교의 영향인지 만사태평으로 보였다. 그 배경에서 국왕과 정당들, 종교지도자들은 부와 권력의 세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네팔의 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나마 네팔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성원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네팔 국민들의 노력을 무시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단순하게 좌파의 준동으로 매도한 것이다. 네팔의 민주화 운동에 주목하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네팔에 관한 그밖의 기록은 브레이크뉴스(www.breaknews.com)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네팔에 관한 그밖의 기록은 브레이크뉴스(www.breaknews.com)에 올렸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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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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