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연 누드 파문, 이건 아니지 않나?

[주장] 문제 왜곡과 또 다른 폭력의 재생산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등록 2004.02.16 15:21수정 2004.02.16 21:28
0
원고료로 응원
탤런트 이승연씨의 소위 ‘위안부 누드’ 사건이 전국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정신대대책협의회 등 관련단체에서는 즉각 서비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놓았고 공중파 방송국에서는 이미 촬영한 이씨의 출연장면을 삭제하는 등 암묵적인 출연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동통신 3사는 이씨의 누드를 모바일 서비스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인터넷에서는 이씨 누드 반대 까페가 만들어졌으며, 일부에서는 광화문 시위까지 거론하고 있는 형편이다.


네띠앙 엔터테인먼트와 로토토가 공동 제작한 이씨의 누드 화보집은 전국민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고 앞으로 이씨의 연예활동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힘을 얻고 있음에도 제작자 측에서는 계속 자신들의 선의를 내세우고 있다.

그들은 누드집이 "희생, 복수, 극복이라는 스토리를 통해 여인의 삶을 장중하게 다룬 서사적 작품"이라며 "잊지 말아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관련단체를 비롯한 대다수 국민들의 입장은 그것이 고도화된 상업주의의 산물이며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시각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진실은 무엇일까?

주로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대중영화를 분석한 슬라보예 지젝은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과 영화적 내러티브는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순간 스토리는 더 이상 진지하지 않으며 오직 성교로 이끄는 ‘구실’로만 기능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경우 홍보와 관람의 초점이 항상 그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예술성을 인정받은 영화라 할지라도 노골적인 성의 묘사가 있다면 그를 이용한 센세이셔널리즘의 혐의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소위 반미 영화라고 주장하는 B급 에로영화 <깃발을 꽂으며>가 촛불 시위 장면을 약간 끼워 넣었다고 해서 정치적 영화가 될 수 없으며 반미 감정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싸구려 저질 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씨의 누드와 이 영화의 공통점은 누드와 섹스, 그것자체가 우선하고 유일한 의미이며, 정치적 의미와는 양립할 수 없는 ‘구실’에 불과하다.

대중문화 학자 존 피스크는 사진에 있어 “외연적 의미는 ‘무엇이 찍혔는가'이고, 내포적 의미는 ‘어떻게 찍혔는가'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소재를 다루었다고 해도 변영주 감독의 다큐멘터리와 이씨의 누드의 의미가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정신대’라는 소재, 즉 외연이 아니라 그것이 누드 상품의 차별화 전략이며 센세이셔널리즘의 도구로 다뤄졌다는 내포적 의미다. 스포츠 누드, 강간 누드까지 나온 마당에 더 자극적인 소재를 발굴해 보여준다는 것, 그것이 이씨 누드의 진정한 의미이자 의도이며, 그 때문에 '더 이상의 누드는 없다'는 홍보 문구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문화생산물에서 당사자와의 합의가 기본임은 상식인데도 이러한 과정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피해 할머니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재가 다루어졌다는 점 또한 제작자들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이 사건에 대한 전국민적 공분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담론의 진행이 이씨 측의 과오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음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우선 이씨 측이 사용한 ‘위안부’라는 단어가 계속 사용되고 있다는 점, 성노예로서 명백한 성폭력의 피해자인 할머니들을 옹호한다는 명분하에 이씨에 대한 언어 성폭력이 광범위하게 자행된다는 점은 이 사건에 관한 논란이 계속 본질을 왜곡하고 피해자를 더욱 모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숨겨야 할 민족의 수치가 아니라 국제적인 성범죄이다. 민족적 아픔 이전에 그것이 인권의 유린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점은 언제나 논란을 비껴갔다.

정신대 문제를 누드로 다루는 이들과 더 이상 자극적인 소재를 찾기도 어려울 지경인 성의 상품화. 그리고 누드 열풍의 소비자이면서 또 다른 여성인 이씨에 대한 폭력을 자행하는 이들이 서로 정신대 할머니의 고통을 대변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선의는 문제와 고통의 반복이자 재생산일 뿐이다. 문제의 본질이 올바른 방식으로 이슈화 될 때만이 피해 할머니들의 아픔을 나누고 그 한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산여성신문에도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부산여성신문에도 송고했습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3. 3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4. 4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5. 5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