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해 삼대가 망했다”

[겨울섬여행3]정병직 선생 유가족의 ‘한’

등록 2004.03.02 10:32수정 2004.03.0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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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직 선생 초상화 ⓒ 정진숙

부끄럽게도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삼대가 흥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다카키 마사오로 개명한 조선인 박정희가 만주신경군관학교 졸업식에서 소좌계급장을 달고 졸업생을 대표해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꾸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다’고 선서를 하던 날(1942년) 비슷한 나이의 청년 정병직은 차디찬 대구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정병직 선생은 일제말기인 1938년 정후균, 정문두 선생 등과 함께 사회주의를 이념 삼아 완도군 조약도(현 약산도)에서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를 결성해 그 세력을 강진, 장흥, 해남까지 넓혀가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정병직 선생은 6·25가 터지기 훨씬 전에 같이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그런데 정병직 선생은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해방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마사오 소좌는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딸은 현재 제1 야당의 국회의원으로 차기대표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62년이 흐른 지금 정병직 선생의 유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강진군 마량항에서 철선을 타고 고금도에서 내려 20여 분 차를 달리면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던 사신이 마지막에 들렀다는 섬 조약도(약산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기자는 이 섬에서 정병직 선생의 큰 손녀인 정진숙(41·여)씨를 만날 수 있었다. 국회에서는 ‘친일규명법’이 난도질당하는 때에 진숙씨에게 듣는 가족사는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었다.

독립운동 한 것이 죄 것제. 나는 (경찰에게 당한 치욕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죽을란다. 손주들 잘 사는 것은 보고가야 쓸 것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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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를 하는 정진숙씨 ⓒ 김대호

일본 순사에서 옷만 바꿔 입은 대한민국 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도 꼿꼿하게 견뎌낸 정진숙씨의 할머니 박영금(2003년 작고)씨도 세월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었는지 58년째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지난해 눈을 감았다.

아버지 정소남씨는 목포상고를 나왔지만 항일투사면서 동시에 '빨갱이'인 아비를 둔 죄로 제대로 된 직장 하나 가져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 섬을 떠나지 못했다. 선거 때가 되면 사복경찰이 붙어 다녔고 완도 읍내라도 나갈 참이면 면사무소 직원의 보증이 있어야 가능했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버려라…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되어 월북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묶인 정소남씨. 그의 혀 꼬부라진 노랫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면 정진숙씨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는 한숨을 토해내셨다고 한다.

연좌제로 청춘이 묶여버린 아버지는 맨 정신으로 세상을 살 수 없었는지 날마다 술로 연명하셨고 결국 그것이 병이 돼 16년 전 51세의 나이에 식도암으로 세상을 떴고 어머니 박임례씨도 몇 년 뒤 그 뒤를 이었다고 정진숙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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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당시의 재판기록 ⓒ 김대호

정소남씨는 차마 눈을 감지 못하다가 임종을 지켜보러온 박문재(동일사건 박천세 선생의 아들)씨가 ‘편하게 눈 감아라. 내가 한을 풀어주마’ 약속을 하자 눈을 감았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라 이 모든 짐을 떠안을 수 없었던 장남 정○○(남·39)씨는 세상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현재 약산도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정진숙씨의 뒷바라지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라 한다.

친일파와 친일부역자들이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다시 대한민국을 장악해 민족주의자로 변신해 호위호식을 누리고 있을 때 항일투사 정병직 삼대 가족사는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정진숙씨는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와 합봉(두 사람의 묘를 하나로 합치는 것. 시신이 있는 무덤을 합하는 합장과 달리 시신이 없는 가묘를 합한다는 의미)을 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할머니만 혼자 모셨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되는 날 같이 합장을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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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직 선생 생가. 지금은 빈집으로 남았다. ⓒ 김대호

주변에서 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이 항일투쟁가 집안이라는 천형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할머니와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일투사의 아내를 대한민국 경찰이 고문하다니…"
[인터뷰]정병직선생 큰손녀 정진숙씨

▲ 정진숙씨
- 정병직선생은 어떤 항일투쟁을 하셨는가.
"일제에 의해 발각돼 와해된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약도(약산도) 일대에서 재건해 그 범위를 강진, 장흥, 해남까지 넓혀가며 항일투쟁을 벌이셨다. 할아버지는 그 중 소년부를 맡아 배움에 목마른 섬 소년들에게 야학을 개설하는 등 활동을 하시다가 일제에 발각돼 대구교도소에서 3년간 복역하셨다."

-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할아버지는 6·25가 터지기 훨씬 전에 같이 항일투쟁을 했던 사람들과 함께 갑자기 행방불명되셨다. 전주교도소 폭동 때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경찰이) 보도연맹으로 엮어서 바다에 빠뜨려(수장시켜) 죽였다는 사람도 있다. 전쟁 때 연락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북으로 가신 것은 아닌 것 같다."

- 보훈처에서는 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줄 수 없다고 하나.
"보훈처에 가면 서류조차 받아주지 않는다. 해방 후 행적이 불분명해서 서류를 넣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해방 후에 대한민국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일제에 대항해서 항일투쟁을 한 것인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떤 직원들은 혹시 해주었다가(독립유공자 지정해 주었다가) 북한에 살아나 있으면 누가 책임 질 거냐고 면박까지 주더라. 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자식된 도리로 할머니와 아버지의 한은 풀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할머니가 고문을 많이 당한 것으로 아는데.
"독립운동을 한 남편을 둔 것을 칭찬은 못해줄 망정 우리나라 경찰이 끌어다가 고문을 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가끔 ‘장흥으로 끌려가서 차마 여자로서는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죽을란다’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있는 곳을 대지 않는다고 ‘고쟁이 속을 작대기로 찔렀다’는 말씀을 한번 하신 뒤로는 입 밖에 내지 않으셨다."

- 할아버지 실종 후 아버지의 고통이 컸을 텐데.
"할아버지가 항일투쟁을 하러 다니신 탓에 할머니와 산 것은 실제 따지면 1년도 안 되셨다고 한다. 이름도 감옥에서 지으셨는데 아버지는 그때 받은 편지를 돌아가실 때까지 품에 품고 다니셨다.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7살 때 행방불명 되셨으니까 그 그리움이 더하셨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목포에 나가 목포상고를 졸업하셨는데 연좌제에 묶여 취직도 못하고 섬에서 사시다 보니 울분에 화병이 생기신 것 같다. 술만 취하시면 우시고 주정을 부리셔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 / 김대호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 사건이란?

정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일제의 자료 ‘갑종470호 제2책2호’ 재판기록을 살펴보면 정병직 선생이 활동했던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 사건’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소화16년(1941) 8월6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 조선총독부판사 야마시다와 다께다, 가와두지가 48명의 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 관련자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명을 사법처리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재판기록에는 이들이 ‘조선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경제조직을 인용한 일본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 독립시킬 목적으로…전남운동협의회 재건위원회를 결성했다’고 기록돼 있어 이들이 반제민족해방투쟁을 벌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직은 4년을 활동했으며 곳곳에 농민반을 결성하고 천도교당에서 실시한 야학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스스기농장 간척지문제와 임야매각반대운동 등을 벌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는 정후균·정문두선생에게 징역 4년을 구형한 것을 비롯해 김경태 3년6월, 정병직·정병생·이영직 징역 3년, 박천세 징역 2년6월, 최선일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구형했다.

이들이 친일파도 지정받은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항일투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이며 4년에서 1년6월까지 옥고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누더기가 다 된 친일규명법 상정을 앞두고 있는 국회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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