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맛있는 수업을 했습니다

'오늘'이 아이들에게 '선물'일 수 있을까?

등록 2004.03.04 12:33수정 2004.03.0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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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담임을 맡지 않고 도서관 업무에만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첫 수업시간에 만난 1학년 학생들이 여느 해보다도 더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딱딱한 영어과목이라 그랬는지 아이들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출석을 부르면서 약 2초 동안 아이들과 일일이 눈맞춤을 하다보니 교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듯했습니다.

절반은 스스로, 절반은 강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저와 눈맞춤을 했지만 모두 뒤끝은 좋았습니다. 걱정했던 만큼 호의에 적의로 화답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물론 자기 이름에 영어로 대답하면서 2초 동안 저와 눈을 맞추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웃으면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 여학생과 저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너무 어색해요."
"나도 어색해. 지금 노력하고 있는 거야."

웃자고 한 말도 아닌데,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습니다. 그 웃음 끝에 아이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어둑한 초저녁 거리에서 수은등이 몇 번 깜빡거리다가 환한 빛을 발하듯이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출석부를 덮고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펴게 한 뒤에 다음과 같은 영어 문장을 칠판에 적었습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and today is a gift; that's why they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이며, 내일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 그래서(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오늘을 선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요 단어, 곧 key word 는 '현재, 혹은 오늘날'이라는 뜻과 '선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present'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today(오늘)를 present(오늘, 혹은 선물)라고도 말한다는 것. 저는 그런 내용을 That's why(그래서, 혹은 그런 이유로) 구문과 함께 아이들에게 설명해준 뒤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어제는 역사이다. 아무래도 이 말은 여러분이나 저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 같지요? 정말 그럴까요? 역사가 위대한 정치가들이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만의 전유물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게임을 하느라 5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오늘은 1시간을 줄여 4시간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어제는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도 도전해본 적이 없는 일을 도전해서 성공했으니 그것이 여러분의 역사인 것이지요. 지금까지 공책정리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친구가 공책정리를 잘하게 된다면 그것도 역사를 새로 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내일이 신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요."


전날 저녁 욕실에서 반신욕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혹시라도 잊어버릴세라 그것을 적어놓기 위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서재로 달려가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생각이 떠올라 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지만 아이들이 그 까닭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저는 잠깐 아이들을 둘러본 뒤에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혹시 그런 친구가 있으면 손을 한 번 들어보세요. 한 사람도 없나요? 그럼 오늘 하루가 끔찍한 재앙처럼 느껴지던가요?"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선물일까, 아니면 재앙일까? 아니면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일 뿐일까? 아이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으로 보아 그 답이 선물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만약, 만약에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그 하루가 정말 선물처럼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예."

대답과 함께 피어나는 아이들의 표정을 저는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오히려 어떤 간절한 바람 같은 것을 품고 있는 눈빛은 보기에 좋았습니다. 마치 이런 말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하루 하루가 선물 같다면,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나날일 수 있다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공부도 못하는데, 난 잘하는 것도 없는데, 난 너무 게으른데, 난 꿈도 없고 미래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고민하면서 교과서를 펼치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영어 문장을 읽어가다가 저는 '오늘은 선물이다'라는 대목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오늘이 과연 선물일 수 있을까? 갈수록 경쟁을 부추기고 성적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려는 교육풍토 속에서 과연 아이들은 새롭게 다가온 또 하루가 선물로 느껴질까? 더욱이 성적에 밀려 실업계에 들어온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이라면."

그때 제 머리 속으로 먼저 수직으로 금이 하나 그어졌고, 그것이 지워지면서 수평선과도 같은 금 하나가 다시 그어졌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저는 칠판 위 아래로 수직의 금을 먼저 그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수직의 선은 여러분의 성적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만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려고 하지요. 물론 학생에게 성적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좀 더 잘 할 수 있고 못할 수도 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 차이가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수직의 잣대로 여러분의 가치를 재지는 않겠습니다.

여기 또 하나, 수평의 선이 있습니다. 이 수평의 선처럼 여러분의 생명은 모두 동일합니다.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여러분의 부모님이 통곡할까요? 아니지요. 만약 여러분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부모님들을 이 세상을 다 주고서라도 여러분을 살릴 수만 있다면 살리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려 할 것입니다. 그만큼 여러분의 존재가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수평의 잣대로 여러분을 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조금 부족하고 가진 것이 적어도 동일하게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면 그 날 하루가 선물처럼 느껴지는 그런 멋진 순간들이 여러분에게도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가꾸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오지는 않겠지요?"

저는 오늘 아주 맛있는 수업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교사의 긍정의 눈빛에 보답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습니다. 학교 붕괴, 교실붕괴 운운하는 시대이지만 교사와 학생의 진실은 통하고 있었습니다. 자화자찬이 되겠지만 솔직히 저도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무슨 연극배우도 아닌데, 오늘만 해도 100명이 넘는 아이들과 별별 표정을 다 지어가며 눈맞춤을 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참 다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운 시대일수록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아야 희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미래의 새싹인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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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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