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지의 연보랏빛 봄꿈에 취하다

얼레지와 복수초, 개구리알을 만난 봄나들이

등록 2004.03.23 12:07수정 2004.03.24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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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내렸던 눈으로 가지마다 하얀 눈꽃송이를 매달았던 나무들이 이제 땅 속에 넘실대는 물을 길어 올리면서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줄기의 수분을 말리고 지난 겨울 뿌리를 묻었던 따뜻한 땅 속은 온갖 생명들에게 젖을 물리기 시작합니다. 나무의 메마르고 딱딱한 줄기에서 연한 잎사귀를 돋게 하는 힘은 봄말고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겨우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가까이서 스쳐 날던 산새들도 오는 봄을 맞아 어느 골짜기로 따라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복수초
복수초김경희
지난 2월 초 제주 섬 식물원에서 보았던 복수초를 오늘에야 보게 됩니다. 작년에 꽃을 피웠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다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다른 풀꽃처럼 자신의 씨앗을 퍼뜨리는 데 큰 욕심을 갖고 있지 않는지 작년 개체 수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사촌 꼬마들은 나무들이 떨어뜨린 가지를 주워들고 한 자루 칼을 든 무사가 되어 산길을 휘젓고 오릅니다. 생명들이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눈을 떴으니 그들의 소란스러움은 하나도 남김없이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봄의 전령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봄의 전령사
우리는 봄의 전령사김경희
얼음장 속에서 동안거하던 버들치들이 한결 가벼운 몸을 놀려 유영합니다. 물 밖으로는 연한 파랑 색의 현호색이 피어나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몇 번 셔터를 눌러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피사체의 초점을 잡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개구리알
개구리알김경희
화암사로 올라가는 계곡 바위 벼랑 길 중간 중간에 자리한 물웅덩이 중 가장 넓은 곳에 이르니 우무질의 개구리 알이 가득합니다. 그 까만 물 속의 생명들을 한그루 노란 생강나무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제는 전남 구례 산동 상위 마을에 가서 산수유 꽃을 보고 왔는데 오늘은 여기서 그 비슷한 생강나무를 봅니다.

생강나무
생강나무김경희
서너보 넓이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을 건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길이 바뀌자 바로 옆으로 산죽이 가득한 비탈이 눈길을 붙잡습니다. 벌써 저 아래서 여러 포기의 활짝 핀 얼레지를 보고 왔지만 여기서부터 얼레지의 군락이 시작됩니다.

한굽이 길 휘어 돌면 다음 어느 지점에 얼마나 많은 얼레지가 피어있는지 눈에 선할 정도로 이 길을 수없이 다녔습니다. 마음 안에 가득히 돋아난 모습 그대로 얼레지는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벌써 누군가의 발길과 손길로 훼손된 흔적들입니다. 사람의 눈길이 이르기 전에 어두운 밤 피었다가 저버리면 탐을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얼레지
얼레지김경희
얼레지에게 허용된 지상의 시간은 지극히 짧습니다. 피었던 꽃이 진 자리에 삼각별 모양의 무거운 씨방을 맺은 뒤 푸른 바탕에 갈색 얼룩무늬가 박힌 잎이 누렇게 시드는 것을 끝으로 5월이 오기 전에 그들은 다시 땅속으로 잠적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긴긴 시간을 어둠 속에서 침묵합니다.


그들의 짧은 외출만큼이나 애처로운 것이 봄구슬봉이입니다. 돌 틈에서 그 연한 잎을 숨기고 겨울 추위를 이겨내는 그들에게 허용된 시간은 2년입니다. 두해살이풀이지요. 얼레지가 지고 나면 그들이 꽃을 피웁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 아래 놓인 돌 틈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레지 군락
얼레지 군락김경희
드디어 얼레지 최대 군락지에 이르렀습니다. 벌써 지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에게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여러 장 조심스럽게 찍고 또 찍었습니다. 사찰에서 늘 상주하는 보살님께 저 아래 얼레지가 피었다고 하자 3일 전 그 부근을 통과했을 때는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얼레지에게는 하루가 한 계절처럼 절박한 시간입니다.

내일이면 연보랏빛 꽃잎들이 창백하게 시들면서 그들은 벌써 가을을 불러들일 것입니다. 봄 나들이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여기 있으니 고이 꽃잎을 접으라고 두 손을 모아봅니다. 얼레지의 보랏빛 꽃잎에 취해 봄 한철을 보낼 것입니다.

도롱뇽 알
도롱뇽 알김경희
화암사를 두른 돌담 아래를 돌아 도롱뇽이 서식하는 곳을 먼저 찾았습니다. 오래 전에 까놓은 둥근 알집 속에서 꿈틀대는 생명들의 안부를 살폈습니다. 도롱뇽과 개구리가 엉켜 살던 보금자리는 위태위태합니다. 수로를 연결시키는 콘크리트에서 녹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바위와 낙엽, 도롱뇽 알이 벌겋습니다. 그래도 생명은 태어날 것입니다.


단지 더 걱정이 되는 것은 가뭄과 큰비입니다. 물이 마르면 햇빛에 타죽을 것이고 큰비가 내리면 거친 물결에 휩쓸려 1급수의 수원으로부터 멀어져가기 때문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몇 주 전에 경내에 심었던 산수유 한 그루가 꽃을 피우고 서 있습니다. 보살님께 저 나무를 제가 심었다고 하자 반색을 하며 그렇지 않아도 오늘 주지 스님께서 오랜만에 오셔서 웬 나무를 누가 심었느냐고 묻기에 옛날부터 있었던 나무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함께 산수유를 심었던 객스님은 한 평 짜리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이달의 시가 떠오릅니다.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佛日庵贈因雲釋)

이달

寺在白雲中 (사재백운중)이나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라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하니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로)라

절이 흰 구름 속에 묻혀 있으나
흰 구름을 스님은 쓸지를 않네
객이 찾아와 문을 열고 나서야
온 골짝 송화꽃 쇠었음을 알았네


아직 송화 가루 날리는 때는 아니지만 밖에서는 얼레지가 피었다가 지는데 저 스님은 모르고 계시는 겐지, 얼레지의 보랏빛 법열 속에서 봄날의 하늘을 열고 만물의 숨결을 데리고 천상과 지하를 오르내리시는지 모를 일입니다.

내려가는 길에 보니 오르면서 보았던 얼레지의 만개한 꽃잎이 다시 꽃망울을 접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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