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로 신명 모아 풍년농사 물꼬 튼다

[이철영의 전라도기행 27]남구 대촌동 칠석마을 고싸움놀이

등록 2004.03.25 09:49수정 2004.03.29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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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석
설을 쇠고 나서 자치기나 팽이 치며 노는 것도 시들해질 무렵, 꼬마 녀석들은 작은 ‘고’를 만들어 고샅(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 ‘고’를 매고 이웃 마을까지 넘나들며 슬슬 시비를 건다.

“이겼네 이겼네
우리 동부가 이겼네
졌네 졌네 서부는 졌네”



이에 질세라 동부에서도 얘들이 ‘고’를 매고 나와 응수를 한다.

며칠 그러고 나면 15~20여세의 청소년과 청년들까지 합세하여 제법 어른 고싸움의 흉내를 내며 기세를 올리는데 음력 5~6일에서부터 보름 전까지 이어졌다. 14일에는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고’를 완성하고는 저녁에는 달집을 태우며 한 해 소원을 빈다. 보름날의 자시(子時)가 되는 밤 11시부터는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제사를 지내고 밤을 새워가며 풍물을 치고 논다.

대나무로 뼈대를 엮고 3가닥으로 꼰 새끼줄을 동여매 고를 만든다.
대나무로 뼈대를 엮고 3가닥으로 꼰 새끼줄을 동여매 고를 만든다.오창석
당산제를 올리기 위해 뽑힌 이들은 3개월 전부터 상가(喪家)에도 가지 않고 금욕(禁慾)하는 등 일체의 부정타는 일을 삼가고 당일에는 용변도 보지 않기 위해 3일 전부터 곡기마저 끊는다. 그리고 당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는 금줄이 쳐진다.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漆石)마을은 삼한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동네로 우리말로 하면 ‘옻돌(漆石) 마을’이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곳은 와우(臥牛) 형상인데, 쪼그려 앉아 있던 소가 날뛰게 되면 큰 화를 입게 되니, 머리쪽에 연못을 파 여물통을 대신케 하고, 할머니 당산에는 고삐를 매게 했다. 또, 꼬리가 놓인 쪽의 산에는 일곱 개의 검은 ‘옻돌’을 두어 소의 꼬리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할머니 당산이 있는 마을의 ‘서부’는 ‘음’을 상징하고 할아버지 당산이 있는 동부는 ‘양’이 되니 동·서부의 위, 아래 마을이 나뉘어 고싸움을 벌이게 되면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특히 생명을 키워내는 대지는 여성이므로 할머니 당산이 있는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칠석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을 맞아 달집을 태우고 쥐불놀이를 하여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칠석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을 맞아 달집을 태우고 쥐불놀이를 하여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오창석
보름날엔 (과거에는 보름날엔 쉬고 16일부터 시작되었다) 동·서부간 본격적인 고싸움이 시작된다. ‘고’의 위에는 싸움을 지휘하는 총대장인 ‘줄패장’이 올라타고 2~3명의 부장들이 함께 올라 깃발을 들고 시위를 한다. 그리고 ‘고’의 몸통을 가로지른 ‘가랫대’를 맨 5~60명의 장정들이 줄패장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며, 그 뒤로는 2~30명의 여성들이 꼬리를 잡고 따른다. 처음에는 진양조의 느린 가락으로 부장의 선소리에 따라 장정들이 소리를 받으며 행렬이 나아간다.


“배를 무어라, 배를 무어라(메기는 소리)
사-아 어뒤허 어뒤 허(받는 소리)
삼강오륜으로 배를 무어라
사-아 어뒤허 어뒤 허”


이윽고 몇 번의 진퇴가 거듭되다 ‘고’의 머리가 서로 마주 서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보면 호흡이 빨라지면서 중머리의 빠른 가락이 전의를 드높인다.


“지화자 허 허(메기는 소리)
지화자 허 허(받는 소리)
달도 밝다
지화자 허 허”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끝내고 당산제의 종료를 알리는 나발을 분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제를 끝내고 당산제의 종료를 알리는 나발을 분다.오창석
이윽고 ‘고’의 머리가 맞부딪히게 되면 줄패장의 “밀어라”하는 명령과 함께 장정들이 함성을 지르며 질풍처럼 내달려 밀어붙인다. 승패는 한 쪽의 ‘고’가 땅에 닿는 것으로 갈리게 되는데 승부가 좀처럼 나지 않거나 진 편이 계속 싸움을 걸어 올 때는 2월 초하루까지 보름여의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도 승부를 보지 못할 때는 2월 초하루에 ‘고’의 줄을 풀어 줄다리기로 승부를 낸다.

고싸움놀이보존회 사무국장 이영재(54세)씨는

“어른들 말씀이 일제 때 공출 나가도 장정들 잘 맥여서 이길라고 땅에다 음식 숨겨 놓고 그랬었다고 그래. 요 근동에서 하는 말이 ‘옻돌 놈들 징 치대끼 해라’ 그랬어. 죽을 힘을 다 써서 싸웠제, 한 번 쌈 붙으먼 논바닥에 구르고 엎어 지먼서 귀속에 흙 다 들어 가불고, 팔다리도 부러졌응께, 옛날에는 이긴 데서 물꼬를 관리하게 안 했능가? 일년 내 기죽고 살아야 써, 여그가 일주일만 비가 안와도 개천에 물이 말라분 곳이라 목숨 걸어부렀제.”

고싸움은 정월대보름의 훌륭한 놀이이기도 하지만, 당산(堂山)-와우(臥牛)-동서(東西)-천지(天地)-음양(陰陽)의 세계관으로 수백 년을 이어 온 칠석마을의 대표적인 제의(祭儀)이기도 하다. 어느 명절 놀이보다도 남성적이며 역동적인 고싸움은 과거 전라남도의 많은 지역에서 행해졌던 대보름 행사였으나 지금은 모두 퇴조하고 이 곳 칠석마을에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풍년이 든다고 했던가? 돌아오는 길 탐스럽게도 내리는 함박눈 속에서 6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할머니 당산이 풍년을 기원하는 듯 하늘에 손짓한다.

칠석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는 수령 6백 년의 할머니 당산 나무.
칠석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는 수령 6백 년의 할머니 당산 나무.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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