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재에서 바라본 바위산, 저 멀리 마치 연봉우리 같은 둥그런 바위산과 푸른 상록수림이 어울어져 있다.김정은
현재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유적이라곤 세연정과 동천석실뿐이고, 낙서재와 곡수당은 집터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처음 보길도에 왔을 때만 해도 윤선도란 인물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했다.
'벼슬살이가 뜻대로 안풀린 호남의 지주가 이곳 보길도로 낙향해 풍류한답시고 주민들을 동원해 세연정과 같은 커다란 토목 공사나 시키고, 주민들의 피땀어린 세연정에서 한가롭게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하며 허송세월했던 유약한 지식인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번 보길도와 진도 여행에서 과거 윤선도가 했다는 간척사업의 행적들을 목격하면서 평소 낭만적인 시조나 짓는 유약한 학자라는 편견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윤선도가 엄청난 전답을 소유한 호남 제일의 대부호였으며 일평생 남부럽지 않을 만큼 보길도라는 자신만의 왕국에서 여유롭고 넉넉한 삶을 살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기존 권문세가들과 다른점이라면 최소한 정권 다툼에 패해 낙향한 후 대책없이 풍류나 즐기고 음풍농월이나 할 줄 아는 유약한 지식인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진도 굴포리에 있는 삼별초 배중손 장군의 사당을 찾다가 우연히 그곳 주민으로부터 윤선도가 약 380m의 둑을 막아 약 100정보(町步)의 간척지를 일궈내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상분배했다는 간척사업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윤선도의 실용적인 간척 기술이 후에 그의 후손인 공재 윤두서로 내려와 공재의 외증손인 정약용의 실학사상으로 이어지게 된 단초가 됐다는 사실이다.
소은병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낙서재는 이름 그대로 고산 윤선도가 이곳에 기거하면서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 폐허가 된 집 터에서는 좀처럼 당시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공부를 시켰던 곳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유희 공간인 세연정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비좁다 생각되는 이 집 터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나무와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 그리고 투박하게 생긴 바위 돌뿐이었다. 얼핏 낙서재라는 안내판조차 없었다면 집 터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산수간 바위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뜻을 모르는 남들은 웃는다 하지만
어리석은 시골떼기의 생각에는 내 분수에 맞는가 하노라
-윤선도 <산중신곡> 만흥(漫興)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