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남대문이 열렸어요!"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4.03.31 08:29수정 2004.03.3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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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회의나 모임이 있어 양복을 차려 입고 뭍으로 외출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에서야 주로 작업복을 입고 지내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맸으니 누가 섬에서 온 촌놈인줄 알겠습니까?


그럴듯하게 외관을 갖추고 집을 나섰는데 아뿔싸, 허리띠를 매지 않고 나온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양복 단추를 다 잠그고 허리띠를 매지 않은 것을 감출 수밖에요. 집에서 외출 준비를 하면서 신경을 썼는데도 건망증이 발동하면 그런 실수를 종종 하게 됩니다.

지난 주 서울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몇 군데 볼 일이 있어 차를 잠실에 두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지하철을 타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이었습니다. 전동차 내부 좌석은 빈틈없이 사람들로 빼곡했고 손잡이를 잡거나 혹은 잡지 않은 채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있었습니다. 때는 점심이 지난 나른한 오후였습니다.

바지 지퍼가 내려져 있는 것을 남대문이 열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인가.
바지 지퍼가 내려져 있는 것을 남대문이 열렸다고 한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인가.느릿느릿 박철
나는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양복 저고리를 벗어 들고 오늘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내 앞 좌석에 앉아 있는 20대 후반인 듯한 아가씨가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냥 의미 없이 눈길이 마주친 것이겠지 생각하고 넘겼는데, 그 아가씨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속으로 '이 여자를 내가 어디서 보았을까? 아니면 나를 아는 여자일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아가씨보다 강렬한 눈길을 보내자 여전히 엷은 미소를 머금고 애써 시선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정거장이 지났습니다. 나를 쳐다보며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던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는 씨름 선수인 듯한 20대 청년이 잽싸게 빈 자리에 앉았습니다. 빈 자리에 앉는 것도 동작이 빨라야 하겠더라구요.

전동차 안은 타고 내리는 사람과 안내 방송 외엔 조용했습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고 졸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씨름 선수인 듯한 청년이 나를 쳐다보면서 히죽히죽 웃는 것이었습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닐 테고…. 내가 너무 오버한 것일까?' 그렇다고 다짜고짜 "당신 기분 나쁘게 왜 웃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내 앞에 앉은 청년은 육안으로 볼 때 몸무게가 100kg은 넘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남이 웃는 것을 갖고 시비를 걸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애써 딴청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는 세 정거장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양복 저고리를 다시 입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던 씨름 선수인 듯한 청년이 멈칫멈칫하면서 내게 말을 건네려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청년이 "아저씨…, 저…아저씨 바지 남대문이 열렸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컸습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 내게 쏠렸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나는 다급하게 한 손으로 바지 지퍼를 올렸지만 하필이면 지퍼가 바지 박음질 단에 끼어서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청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내려야 할 곳보다 한 정거장 전에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동차에서 내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면서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습니다. 먼저 내 바지 지퍼가 내려진 것을 본 아가씨가 "아저씨, 남대문이 열렸어요"라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씨름 선수인 듯한 청년이 용기를 내서 "아저씨, 바지 남대문이 열렸어요"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망설였을까를 생각하니 더 웃음이 나왔습니다.

허리띠를 매지 않거나 바지 지퍼를 내리고 다니는 실수를 하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요? 바지 대신 치마를 입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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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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