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가는 마지막 교외선입니다"

[탐방]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서울 교외선

등록 2004.04.01 07:36수정 2004.04.01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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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꿈의 열차라는 고속철도가 개통식을 가졌다. 그 반면 31일 추억의 열차 교외선(서울역~의정부행)의 마지막 운행이 있었다.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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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6시 20분 서울역. 서울에서 의정부로 운행하는 '교외선' 마지막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다 ⓒ 김진석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열차는 서울에서 의정부까지 운행하는 '마지막' 열차입니다. … 오늘도 즐겁고 편안한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2004년 3월 31일 수요일 18시 20분. 서울역에서 의정부역으로 출발하는 교외선 통일호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이라는 담담한 작별 인사와 함께.

지난 30일 개통식을 가진 고속철도가 4월 1일 드디어 '꿈의 속도'를 실현한다. 반면 그 꿈의 뒤에는 사라져가는 열차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경부선의 경우 새마을호가 63개차에서 28개차로, 무궁화호가 69개차에서 20개차로 각각 감축 운행될 예정이다. 호남선도 새마을호 16개차에서 8개차로, 무궁화호 40개차가 22개차로 줄어들며 이와 함께 통일호 열차는 폐지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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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흘러가는 풍경만큼이나 교외선 열차도 시간을 흘러가는듯 한다 ⓒ 김진석

41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 교외선

1963년 8월 개통해 북한산을 넘나들었던 서울 교외선(서울역-의정부역)이 고속철 시대를 맞아 적자를 면치 못하고 화물 열차 전용 선로로 변경된다. 열네 개 역(서울역~수색~일영~장흥~의정부)에 정차하며 하루 세번 48.3㎞를 한시간 반 동안 달렸던 서울 교외선이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고속철 시대에 맞춰 새롭게 단장한 서울역 승강장에 교외선이 기적을 울리며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사진기 셔터 누르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승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출발한 마지막 교외선은 승객들의 아쉬움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태풍보다 빠르다는 시속 300㎞의 고속철 시대. 교외선의 속도와 추억을 마지막으로 함께하고 있는 승객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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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행을 마치자 한 할아버지 한분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이라며 기관사(강필구씨)의 사인을 받아갔다. ⓒ 김진석

"서민에게 위안 주는 교외선, 한쪽만 생각하는 교외선 폐지 아쉬워"

아버지가 물려주신 수동 카메라로 열심히 기념 촬영을 하고 있던 강진영(20)씨는 "수능을 준비하던 시절 힘들 때마다 교외선을 타며 큰 위안을 얻었다"며 "대학에 들어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 꼭 같이 오고 싶었는데, 여자 친구가 생기기 전에 열차가 사라져 섭섭하다"고 운을 뗐다.

강씨는 "고속철도의 경우엔 덜컹거리는 기차의 참 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며 "느린 것도 나름의 소중한 값어치가 있는데, 서울 교외선은 물론 통일호가 전부 사라져 버려 안타까울 뿐"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지막 교외선을 타기 위해 인천에서 왔다는 윤혜영(46)씨도 친구들과 기념 촬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간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해 무려 세시간을 기다려 탑승했다는 윤씨는 "이젠 어느덧 대학생 자녀를 둔 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열차를 타니 7, 80년대 대학 시절의 감흥이 느껴진다"며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흡족해 했다.

윤씨는 "기다려야 탈 수 있는 열차, 기다림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열차"로 교외선을 정의하며 "시대가 빨라지면서 시설은 좋아졌지만 과거 열차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사라져 아쉽다"고 전했다.

가족과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일부러 열차에 오른 조정래(56)씨도 할 말이 많았다. 조씨는 "제 아무리 경제 성장이 최우선이라지만, 삶의 질적인 부분을 생각한다면 교외선이 전면 폐지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국민 소득이 증가했다 해도 서민들에게 교외선은 삶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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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두고 걸어가는 강필구 기관사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 김진석

조씨는 "여전히 서민들은 어렵고, 정작 그런 서민들을 위한 운송 수단은 남겨놓지 않은 채 결국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고속철에 집중 투자하는 것이 답답하다"며 "서민들과 부유층을 둘 다 잘 살게 만들어 줄 정부의 정책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는 조씨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집이 대전이어서 주말이면 열차를 이용해 고향을 방문하고 있는 이인경(25)씨도 "고속철 운행으로 통일호가 사라지고 무궁화호마저 운행이 줄어들면서 갑자기 요금이 올라 비용 때문에 집에 자주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워지는 게 사실"이라며 "점점 열차의 낭만을 잃어버리게 될 것"같다고 말했다.

20년간 교외선 시간에 맞춰 출퇴근을 했던 방명자(65)씨의 아쉬움도 두말하면 잔소리다. 버스 노선이 있긴 하지만, 비용과 시간이 더 많이 소요돼 당장 내일 아침 출근부터 걱정이란다.

20년간 정들었던 교외선과 헤어질 생각에 뭐라 표현하지 못할 만큼 안타깝다고 토로한 방씨는 "교외선은 그간 살면서 각박한 세상을 잊고 잠깐이나마 삶의 여유를 맛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며 "교외선의 포근함과 편안함이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전했다.

"아듀! 교외선"

이 날의 스타는 마지막 교외선을 운행했던 강필구(40) 기관사였다. 기념 촬영과 사인 요청 등 승객들의 요구에 넉살 좋은 웃음으로 화답한 강씨는 교외선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강씨가 지방에 있다가 서울에 올라왔을 때 처음 견습했던 열차가 교외선이었는데, 그 인연 때문인지 교외선 마지막 열차를 그가 운행하게 된 것이다.

강씨는 "매일 출퇴근 하느라 교외선을 이용하던 고정 손님들이 눈에 밟힐 것" 같다며 "예전에 비해 차량 환경도 좋아지고 시대도 좋아졌지만, 그에 비해 추억은 점점 사라져 아쉽다"고 감회를 털어놓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교외선을 이용하던, 힘이 들고 어려운 시절일수록 오히려 추억과 정이 쌓이는 것" 같다며 "교외선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로 인해 수요가 늘어나 다른 방법으로 교외선이 부분적으로나마 되살아 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아!아!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운전 정지 관계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강필구 기관사의 안내 방송에 그 누구도 짜증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 교외선 안의 풍경은 여유로웠고 편안해 보였다.

두 손을 꼭잡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노부부, 손자 손녀에게 마지막 교외선을 태워 주고 싶었다는 할머니, 천천히 캔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 교외선 풍경을 전화로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사람 등. 그들의 모습은 따뜻하고 유쾌한 교외선과 꼭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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