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에 시달리는 호주 농민들의 눈물겨운 '쇼'

시드니 농축산 축제 '로열 이스터 쇼'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

등록 2004.04.08 17:44수정 2004.04.0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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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려라, 돼지야"  숨막히는 돼지 경주
"빨리 달려라, 돼지야" 숨막히는 돼지 경주로열 이스터 쇼
모래밭 트랙 위로 흰 돼지들이 '날쌘돌이'처럼 달음박질쳤다. 마치 경주마처럼 돼지들이 결승점을 통과하자 관중석에선 함성과 탄식소리가 가득했다.

아무리 훈련시킨 돼지들이지만 돼지는 돼지였다. 잘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서서 콧구멍만 벌렁대는 놈이 있는가 하면, 난간에 부딪쳐서 나뒹굴다가 방향감각을 잃고 허둥대는 놈도 있었다.

순위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달려가는 돼지들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훈련시키느라 애쓴 농민들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면 그만이었다.

"호주농민들 만세! 호주돼지도 만세다!"

빚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눈물겨운 쇼

8일 아침, 호주에 주재하는 외신기자들로부터 '지상에 이보다 더 감동적인 쇼는 없다'라는 극찬을 전해듣고 호주농민들이 벌이는 농축산 축제 '로열 이스터 쇼(Royal Easter Show)'가 열리는 시드니 올림픽타운을 찾았다.

4년 전, 지구마을의 축제인 시드니올림픽이 개최되었던 바로 그 장소다. 입구에 도착하니, 오전 9시 이전인데도 기자의 취재를 돕기 위해서 미디어센터 소속의 에이미 로렌스(23)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미디어 패스를 목에 걸고 매표소로 향했다. 로렌스는 "표를 살 필요가 없다"며 말렸다. 그러나 "한바탕 축제지만 사실은 빚에 시달리는 농민들이 하는 눈물겨운 쇼"라고 했던 외신기자들의 말이 생각나서 26호주달러(약 2만원 정도)를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호주의 아리랑' 같은 '왈칭 마틸다'를 연주하는 농민밴드
'호주의 아리랑' 같은 '왈칭 마틸다'를 연주하는 농민밴드로열 이스터 쇼
매표소 앞에 고적대 차림의 농민취주악대가 '호주의 아리랑' 같은 '왈칭 마틸다(Waltzing Matilda)'를 흥겹지만 엉망진창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를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조금 있으면 구름처럼 몰려올 겁니다. 매년 100만명 넘게 모이는 걸요"라고 로렌스가 말했다.

100만명이면, 시드니 인구가 400만명이니까 4명에 1명꼴로 이스터 쇼를 찾는다는 얘긴데…. 선뜻 믿기 어려운 숫자였다. 그러나 미디어 센터에 들러서 그동안의 자료들을 살펴보니 매년 100만장 넘게 입장권이 팔린 게 사실이었다.

자료에는 1823년 시드니 파라마타에서 맨 처음으로 '로열 이스터 쇼'가 개최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금년이 181회 이스터 쇼인 셈이다. "한 해도 거른 적이 없다"고 로렌스가 거들었다.

가뭄과 FTA 등으로 휘청거리는 호주농업

TV뉴스를 보면 호주농민들이 시위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처럼 과격한 시위는 아니지만 피켓을 들고 의사당으로 행진하는 그들의 표정에서 절망과 분노가 넘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의사당 안엔 '농민당'으로 불리는 국민당 의원들이 있다. 국민당은 얼마 전까지 '지방당(Country Party)'이라는 당명을 가졌던 전적으로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지금은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연합하여 자유-국민당 연합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을 석권하다시피하는 국민당이라고 해서 각종 천재지변과 국제 농축산물시장의 변화를 척척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금년 초에 미국과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국민당 의원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제 농축산물시장에서 무한경쟁을 펼치고 있는 미국이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아, 가뜩이나 농산물 가격의 하락과 가뭄 등의 천재지변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호주농민들이 잔뜩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 서북쪽 400Km쯤에 위치한 농촌 더보에서 내려온 스티브 기그(52)를 만났다. 그는 금년에 수확한 피망을 갖고 이웃과 함께 농산물경진대회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몇 십 년만의 혹독한 가뭄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피망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지하수를 개발해서 금년엔 제법 많은 수확을 기대했는데 수확직전에 큰 홍수피해를 당했다. 그 또한 몇 십 년만의 홍수였다"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비가 그치자 이번엔 설상가상으로 메뚜기 떼가 몰려왔다. 수백만 마리의 메뚜기들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서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의욕을 잃었다. 지하수 개발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게됐다. 이번에 출품한 피망은 비닐덮개를 한 이웃의 농장에서 수확한 것이다."

스티브 기그의 말이 아니라도 호주농축산업이 휘청거린다는 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호주농업의 체질이 본래부터 허약한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호주의 부자들은 전부 농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시절도 있었다.

영국이나 유럽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꿈꾸었던 '오스트레일리안 드림'도 대개는 농업으로 성공하는 것이었다. 유럽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자기소유의 큰 농장에서 양이나 소를 기르고 감자나 밀농사를 짓는 자연 친화적인 꿈.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료와 사진 등을 챙겨서 행사장으로 나가보니 각 코너마다 관람객들이 넘쳐났다. 부활절을 맞아 학교가 2주 동안의 방학을 시작해서 많은 학생들이 부활절 휴가를 낸 부모의 손을 잡고 행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드림 월드'라고 이름 붙인 코너에선 초등학교 학생들이 새끼 양과 염소에게 우유를 먹이면서 깔깔대고 있었다. 그동안 어른들은 바로 옆 코너에서 진행되는 '우량 비육우 선발대회'에 출전한 소들의 점수를 주최측이 나눠준 채점표에 적고 있었다.

"몇 점이나 줄까?" 비육우 경연대회 장면.
"몇 점이나 줄까?" 비육우 경연대회 장면.로열 이스터 쇼
쇼그라운드 쪽으로 돌아가니, 톱질하는 소리와 도끼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남자들이 아니었다. 올해 처음으로 시작한 여성대회였다. 호주를 비롯해서 뉴질랜드 미국 핀란드 등 여러 나라 출신의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52세의 할머니도 있고 17살의 소녀도 있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돼지와 생쥐 레이스였다. 레이스가 끝나고 돼지 다이빙 경연이 이어졌다. 텀벙거리는 돼지들의 기상천외한 입수동작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났더니 배가 고팠다.

잔칫집에서 먹거리는 기본 중의 기본. 유기농 식품만 사용하는 이스터 쇼장의 메뉴는 아주 다양했다. 마치 음식박람회 같았다. 아무리 찾아도 한국음식 코너가 없어 매콤한 월남국수 한 그릇과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소시지로 허기를 달랬다.

농민들의 쇼라고 해서 재미가 없으면 말이 안 된다. 쇼는 그야말로 쇼다워야 한다. 오토바이 묘기, 자동차 묘기, 패션쇼, 컨트리 뮤직 공연 등은 관중을 유혹하는 일종의 '삐끼' 역할을 맡는다.

그 중에서도 어린이들을 유혹하는 게 각종 놀이기구다. 공중그네나 바이킹을 타는 곳엔 차례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들의 손엔 동전 한두 개씩 들려져 있었다.

문득 여기서 생기는 수익금이 어디에 쓰여지는지가 궁금해졌다. 이스터 쇼 PR 요원인 재클린의 답변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전액 곤경에 빠진 농민들을 위해서 쓴다."

호주농민들의 이농현상은 한국과 같다. 늘어나는 빚을 감당 못하거나 앞날의 전망이 없어 자살하는 농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비슷하다. 특히 농촌의 급증하는 이혼율과 청소년 자살률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1500명의 자원봉사자들

비육우의 고장인 와가와가에서 온 기자 사이먼 보스(41)를 만났다. 그는 농촌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사의 기자답게 농촌예찬론을 길게 늘어놓았다.

"농촌은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고향이다. 도회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을 그리워하고 농경사회적 상상력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몇 대만 올라가면 모두가 농부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농민들이 버려지고 있다. 농업을 이끌어 가는 그룹은 농민들이라기보다는 농축산기업들이다. 호주도 영락없는 그 꼴이다. 극소수의 영농기업가만 살아남아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대대로 농민이었고, 계속해서 농민이고 싶은 사람들이 2주 동안 알뜰살뜰 키운 가축들과 농산물을 들고 시드니로 나와 쇼를 했다. 녹슨 나팔도 불고 줄은 삐뚤빼뚤 하지만 수백 명이 모여서 라인댄스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버려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시드니 사람들만은 농민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매년 이스터 쇼를 보기 위해서 10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행사장을 찾기 때문이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호주사람들이 이스터 쇼에서만은 아낌없이 돈을 쓴다. 한 가족이 행사장에서 지출하는 비용이 평균 300호주달러(약 24만원)라고 한다. 먹고 놀이기구 타고 농산물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돈만 쓰는 게 아니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자원봉사자만 약 1500명이다. 그들은 행사장 안내는 기본이고 농민들을 도와서 짐승들의 배설물을 함께 치우고 멋지게 쇼를 하도록 돼지나 양들의 목욕도 시켜준다.

말 우리에서 2004년 '미스 이스터 쇼걸' 미건 캐넌(24)이 말 손질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학위를 두 개나 받은 캐넌은 호주농민들의 상징인 아쿠부라스(Akubras) 모자를 쓰고 밝게 웃으면서 관람객들을 맞았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캐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도시 사람들이 농민들을 위해서 애쓰는 것은 자선행위나 봉사활동이 아니다. 고통당하는 농민들을 버려 두면 도시 사람들은 농민들 이상의 대가를 지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림픽경기장 위의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인 불꽃놀이를 끝으로 그날의 행사는 끝났다. 행사장 출구에선 아침에 만났던 농민밴드가 여전히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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