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점이나 줄까?" 비육우 경연대회 장면.로열 이스터 쇼
쇼그라운드 쪽으로 돌아가니, 톱질하는 소리와 도끼질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남자들이 아니었다. 올해 처음으로 시작한 여성대회였다. 호주를 비롯해서 뉴질랜드 미국 핀란드 등 여러 나라 출신의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52세의 할머니도 있고 17살의 소녀도 있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돼지와 생쥐 레이스였다. 레이스가 끝나고 돼지 다이빙 경연이 이어졌다. 텀벙거리는 돼지들의 기상천외한 입수동작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났더니 배가 고팠다.
잔칫집에서 먹거리는 기본 중의 기본. 유기농 식품만 사용하는 이스터 쇼장의 메뉴는 아주 다양했다. 마치 음식박람회 같았다. 아무리 찾아도 한국음식 코너가 없어 매콤한 월남국수 한 그릇과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소시지로 허기를 달랬다.
농민들의 쇼라고 해서 재미가 없으면 말이 안 된다. 쇼는 그야말로 쇼다워야 한다. 오토바이 묘기, 자동차 묘기, 패션쇼, 컨트리 뮤직 공연 등은 관중을 유혹하는 일종의 '삐끼' 역할을 맡는다.
그 중에서도 어린이들을 유혹하는 게 각종 놀이기구다. 공중그네나 바이킹을 타는 곳엔 차례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들의 손엔 동전 한두 개씩 들려져 있었다.
문득 여기서 생기는 수익금이 어디에 쓰여지는지가 궁금해졌다. 이스터 쇼 PR 요원인 재클린의 답변은 아주 간단명료했다.
"전액 곤경에 빠진 농민들을 위해서 쓴다."
호주농민들의 이농현상은 한국과 같다. 늘어나는 빚을 감당 못하거나 앞날의 전망이 없어 자살하는 농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비슷하다. 특히 농촌의 급증하는 이혼율과 청소년 자살률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1500명의 자원봉사자들
비육우의 고장인 와가와가에서 온 기자 사이먼 보스(41)를 만났다. 그는 농촌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사의 기자답게 농촌예찬론을 길게 늘어놓았다.
"농촌은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고향이다. 도회에 사는 사람들이 자연을 그리워하고 농경사회적 상상력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몇 대만 올라가면 모두가 농부의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농민들이 버려지고 있다. 농업을 이끌어 가는 그룹은 농민들이라기보다는 농축산기업들이다. 호주도 영락없는 그 꼴이다. 극소수의 영농기업가만 살아남아 점점 그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대대로 농민이었고, 계속해서 농민이고 싶은 사람들이 2주 동안 알뜰살뜰 키운 가축들과 농산물을 들고 시드니로 나와 쇼를 했다. 녹슨 나팔도 불고 줄은 삐뚤빼뚤 하지만 수백 명이 모여서 라인댄스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버려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시드니 사람들만은 농민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매년 이스터 쇼를 보기 위해서 100만명 이상의 시민들이 행사장을 찾기 때문이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호주사람들이 이스터 쇼에서만은 아낌없이 돈을 쓴다. 한 가족이 행사장에서 지출하는 비용이 평균 300호주달러(약 24만원)라고 한다. 먹고 놀이기구 타고 농산물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돈만 쓰는 게 아니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자원봉사자만 약 1500명이다. 그들은 행사장 안내는 기본이고 농민들을 도와서 짐승들의 배설물을 함께 치우고 멋지게 쇼를 하도록 돼지나 양들의 목욕도 시켜준다.
말 우리에서 2004년 '미스 이스터 쇼걸' 미건 캐넌(24)이 말 손질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학위를 두 개나 받은 캐넌은 호주농민들의 상징인 아쿠부라스(Akubras) 모자를 쓰고 밝게 웃으면서 관람객들을 맞았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캐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도시 사람들이 농민들을 위해서 애쓰는 것은 자선행위나 봉사활동이 아니다. 고통당하는 농민들을 버려 두면 도시 사람들은 농민들 이상의 대가를 지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림픽경기장 위의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인 불꽃놀이를 끝으로 그날의 행사는 끝났다. 행사장 출구에선 아침에 만났던 농민밴드가 여전히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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