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권 제한, 초대받지 못한 자들

<미디어비평> 노동자 투표권 제한, 언론도 비판받아야

등록 2004.04.20 11:23수정 2004.04.2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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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17대 총선이 막을 내렸다. 흔히 축제에 비유되는 선거는 민주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제도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헌법과 법률에도 이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헌법 제24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선거법 제6조 1항에도 "국가는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국민의 기본적 권리인 선거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 제한이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17대 총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도에 따르면 180만명에 달하는 건설 일용노동자들이 투표권 행사에 제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노조가 없는 중소업체 노동자들의 경우도 투표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도됐다.

'선거권 제한' 무엇이 문제인가

왜 국민의 기본권인 선거권이 제한을 받는 일이 발생하는가?

첫째는 선거법상의 투표 시간 때문이다. 현행 선거법에서는 투표 시간을 오전 6시에서 오후 6시까지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대는 노동자들의 근무 시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사용자의 배려가 없거나 노사간의 협정이 없으면 투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 보궐 선거에 한해 오후 8시까지로 연장한 투표 마감 시간을 일반 선거에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선거법상의 부재자 투표 제도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현행 선거법에서는 '사는 곳이 같은 사람 2천명 이상이 부재자 투표를 신청했을 때에만 부재자 투표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때문에 사실상 공단이나 건설 현장 등에 부재자 투표소를 설치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에 주소를 둔 노동자들은 고향으로 가서 투표를 하거나 개인적으로 부재자 투표를 신청해야 한다. 그러려면 신청하는 데 하루, 투표(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하는 데 하루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루벌이로 생활하는 일용직 노동자들 경우에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따라서 부재자 투표소 설치 기준을 '예상 부재자 수 1천명 이상'으로 낮추고 또 당사자들이 신청하지 않더라도 투표소 설치가 가능하도록 그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

셋째는 선거일이 관공서의공휴일에관한규정(대통령령)에 따라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간 기업체의 경우 사규에 선거일을 공휴일로 따로 지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노동자들은 정상적으로 출근해야 한다.


실제로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직장인 7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4ㆍ15 총선 당일 출근 여부"에 대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0.4%가 '출근한다'고 답했다. 그 가운데서도 건설ㆍ일용직은 75.8%, 서비스ㆍ유통업은 80.5%가 투표일에도 출근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따라서 선거일을 임시공휴일에서 5월 1일 노동절처럼 유급 휴일로 정하는 등 대책이 있어야 하겠다.

넷째는 노동자가 청구할 경우에만 선거권을 보장하고 있는 현행 근로기준법 제9조 때문이다. 따라서 근로자의 형식적인 청구가 없다는 핑계로 사실상 근로자의 선거권 행사가 제한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이 조항은 같은 근로자이면서도 청구 여부와 상관없이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선거일에 휴무를 하는 공무원이나 교사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불평등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 차별을 받고 있다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진용기씨가 지난 13일 "근로기준법 제9조가 헌법에서 보장된 선거권과 평등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선거권 제한' 풀려는 정치권 노력 없어

'선거권 제한'을 풀려고 정치권은 어떤 노력을 했나? 결론적으로 말해 정치권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정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노력을 외면했다.

2002년 6월에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서 선거일을 유급휴일로 지정하자는 법안을 입법 청원했지만 16대 국회는 이를 심의조차 하지 않았다.

또 지난 2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선거법 개정을 논의할 때 투표 시간에 대해서는 열린우리당이 저녁 8시까지 연장하자고 했으나 다른 당의 반대로 보궐선거 때만 연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재자 투표소 설치 기준에 있어서도 한나라당 이재오 정개특위 위원장이 "설치 기준을 '예상 부재자 수 1천명 이상'으로 낮추는 방안을 소위에서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하는 등 설치 조건을 완화하기로 애초 합의했지만 결국 당 지도부의 반대에 막혀 기존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지역 신문의 보도 태도는 어땠나?

위: <영남일보> 4월 9일, 아래: <매일신문> 4월 10일
위: <영남일보> 4월 9일, 아래: <매일신문> 4월 10일
그렇다면 지역 신문은 '선거권 제한' 문제와 이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를 제대로 보도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사실 선거권 문제는 선거법 개정 논의가 한창일 때 이를 집중 보도하여 부각시키고 여론을 환기시켜 정치권에서 해결하도록 해야 효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한 기사는 지역 신문에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랬던 지역 신문들이 선거일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각 한차례씩 선거권 제한에 대한 보도를 했다. <영남일보> 4월 9일자 <일하고 투표하라니-"힘드네요">와 <매일신문> 4월 10일자 <비정규직 투표 못할 판>이란 기사였다.

그런데 <매일신문>은 "업체 대체 인력 없어 15일 휴일 배려 못해"라고 보도해 업체의 영업권이 국민의 참정권보다 우위에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반해 <영남일보>는 "성서공단 노조 등 참정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을 보도하는 등 선거권을 제한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지면에 담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들의 보도는 모두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선거일이 코앞인데 과연 이들의 보도가 선거권 제한을 푸는 데 얼마나 큰 기여를 할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끝으로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인 선거권을 자신의 직업에 따라 차별 받는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선거권 행사에 결격 사유가 없는 모든 국민에게 투표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보장되어야 한다. 때문에 정치권은 17대 국회가 소집되는 대로 빠른 시일 안에 선거권 제한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 언론도 선거철의 한번 관심에 그치지 말고 꾸준하게 정치권의 잘못된 행태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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