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모인 다양한 삶의 의미는?

유홍준 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을 읽고

등록 2004.05.04 01:14수정 2004.05.0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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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시집을 읽노라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의 밑바닥은 무엇일까? 여기서 밑바닥이란 더 이상 캘 필요 없는 사상적 근원을 말한다. 그의 시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단일한,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의 밑바닥이 궁금한 것이다.

그의 시집 가장 첫 시는 아마 시집의 서시쯤 되리라 싶은데,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머릿고기처럼 / 납작하고 납작하게 눌려져서라도 / 말하고 싶다 핏물이 스며나오는 책갈피 / 넘길 때마다 핏물이 묻어나오는 시집을 묶어 / 팔고 싶다 서점이 아닌 저 식육 코너에서 무표정하게 핏기 없이 ([식육 코너 앞에서] 부분)

그는 시가 자신의 살점이라고 인식한다. 시를 써서 시집을 내는 것을 살점을 뭉텅, 뭉텅 잘라 파는 행위와도 같다고 인식한다.

사실 시 쓰는 일이 그저 유희에 그치는 일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삶의 진실성이 시 쓰는 일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삶의 진실성이 담긴 시를 찾기란 참 어렵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시에 자기 삶의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진실이 담긴 시가 나오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이 가로막기 때문이리라. 차마 말하지 못하는 두려움, 차마 다가설 수 없는 두려움. 자신의 살을 뭉텅, 뭉텅 잘라내야 하는 두려움. 그런 두려움에 질려 미사여구로 변장된 시나 쓰게 된다. 그렇다면 유홍준은 시 쓰기의 두려움, 진실 보이기의 두려움을 극복한 시인일까?

시 쓰는 일이 살점을 잘라 파는 행위라는 식의 인식이 지나치다 보면 그런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표현 그 자체에만 몰두할 수 있다. 사상은 없고 독자에게 충격만 주어 또다른 형태의 진실 부족형 시가 되는 것이다. 유홍준에게서도 그런 징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피를 빽빽히 걸어놓은 세탁소 // 이것 네 거죽이고 / 저건 네 마누라 거죽이야 얇디얇은 / 비닐 커버로 둘러씌워진 거죽마다 명찰을 달아놓은 세탁소 // 다리미질에 지친 사내 계단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 똥 누는 폼으로 쪼그리고 앉아 / 사타구니 볼록하지 튀어나온 불알 두 쪽, // 누가 너무 올라붙는 옷은 입지 말라고 했지? // 창문 열려진 / 세탁소에 온 동네 거죽들이 흔들거린다 / 805호 여자 806호 남자 허리를 휘감고 있다 // 내복처럼 / 살갗에 너무 올라붙는 사람은 / 왜 입지 말라고 했지? // 담뱃불에 지져진 구멍 때우려 / 나, 허름한 내 거죽 들고 세탁소 간다 (<세탁소> 전문)

<세탁소>는 참 재미있다. 그런 점에서 시적인 유머를 획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람의 옷은 단지 옷이 아니라 그 사람의 껍데기이고 그 껍데기에는 그 사람 생활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는 발상 자체가 우습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시의 기발한 표현을 따라가다보면, 일어나는 허전함을 감출 수 없다. 이즈음에 이런 섣부른 판단도 하게 된다. 그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추구하는 해체시 경향의 시인일까?


빵 속에 쥐가 들어 있다 / 빵은 버리고 쥐만 먹는다 / 아이들이 주머니 속에 쥐를 기른다 / 주머니 속에 쥐를 넣고 학교에 간다 / 세상 모든 아이들은 쥐꿈을 꾸고 / 쥐는 아이들의 두상을 파먹기 시작한다 / 아이들이 쥐에게 제 발가락을 먹이고 / 여기저기 쥐 이빨 자국이 있는 아이들은 / 눈동자의 흰자위가 사라져간다 / 하수구를 좋아하고 부패한 음식을 찾고 / 골방에 틀어박힌다 야행성이 되어간다 / 어두울수록 그들은 편안해진다 어둠 속에서 / 자라나는 이빨을 어쩌지 못해 서로를 물고 뜯는다 / 바퀴 아래 깔린 쥐의 주검 위에 주검이 덧달라붙고 / 가랑이 속으로 쥐가 들어간 여자는 교성을 질러댄다 /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의 배를 가르면 열세 마리의 / 빨간 쥐새끼가 옹그리고 있다 (<빵 속에 쥐가,> 전문)

유홍준의 상상력은 가히 상상을 넘어선다. <빵 속에 쥐가,>는 프란시스 카프카의 <변신>을 보는 듯한 소름이 느껴진다. 그러나 표현의 충격에만 머물러서 유홍준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면 어설픈 독자가 되고 만다.

빵과 쥐는 어떤 의미일까? 빵이 생활이라면 쥐는 죽음이다. 생활은 죽음이다. 생활하면 할수록 죽음은 살찐다. 누구나 뱃속에 뒤룩뒤룩 살찐 죽음을 키우며 생활한다. 살아 있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용기내어 말하는 점이 유홍준의 진실일까?

이것뿐이라면 좀 시시하다. 일상적 인간이 하는 죽음에 대한 고민을 시인이 시로 대신 표현하는 것. 그 나름의 가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 인간의 고민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린다.

주검을 빨던 파리가 / 산 자의 음식 위에 날아와 앉는다 // 죽음 맛을 보라고, // 송장 위에 앉았던 파리가 / 밥상 위에 날아와 앉는다 // 쫓아도, // 쫓아도, // 죽음 맛을 아는 고양이 상가의 담벼락에 웅크리고 // 고기 삶는 여자, / 상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 무쇠솥 속의 살덩어리를 뒤집지 못해 / 뿌연 수증기 속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끙끙거린다 / 핏발 가시지 않은 살덩어리에 고기 삶는 여자 / 푹, 푹, 칼집을 넣는다 (<고기 삶는 여자> 전문)

죽음은 쫓아도, 쫓아도 달아나지 않고 어느새 내 삶의 담벼락에 와서 웅크리고 있다. 삶은 죽음 속에 머리를 처박고 끙끙거리는 짓이다. 육체는 죽고나면 비곗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자들을 잘 먹여서 그들도 비곗덩어리가 되게 한다. 그것이 죽음이다. 유홍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절실하고도 처절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밑바닥을 다 보았다는 후련함은 없다.

얼어 죽은 여자를 본다 // 붉은 입과 / 다 감지 못한 눈동자에 허연 얼음이 박혀 있다 // 그녀의 입에서 / 지독한 안개가 흘러나온다 // 오직, 맨발만이 / 아직 더 먼길을 가겠다는 듯이 / 댓잎처럼 새파랗게 살아 있다 (<아직 더 먼길을> 전문)

더 갈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쳤지만 더 가려는 것이 사람이겠다. 얼어 죽어도 못다한 것을 하려고 새파랗게 살아 있는 사람의 의지. 가장 사람다움은 이러한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이 주는 고통과 슬픔이 아무리 집요하더라도 굴할 수 없는 사람의 의지. 그런 의지를 지닌 사람에 대해 연민하는 시인의 모습을 이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어머니자루를끌고다녔지,너덜너덜옆구리터진어머니자루,아버지패대기치던어머니자루,줄줄눈물이새던어머니자루,길바닥에주저앉아터진옆구리를움켜쥐던어머니자루,어린내가아버지바짓가랑이를잡고매달리자놔둬라,놔둬라머리카락을쓸던어머니자루,고구마로만배를채우던어머니자루,몰래들어내던참깨자루나를꼭끌어안고죽어버지자던자루,넝마같이덕지덕지덧댄자루,장터에서못본척외면한자루,꾸깃꾸깃자궁에서돈을꺼내던자루,자루에서태어난나는자루를까마득히잊고사는자루,자루가무언지도모르는,자루를낳은자루 (<자루 이야기> 전문)

삶은 이처럼 고단한데, 그 고단함을 다 견디며, 다 용서하며 살았는데, 그래도 죽음은 성큼 보상도 없이 찾아오고, 순순히 그 또한 받아들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자루 이야기다. 그런 사람에 대해 연민하는 유홍준,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한없이 눈물을 흘리듯 시를 쓰는 유홍준 시인의 모습이 비로소 선하게 그려진다.

그가 노동자 출신이라서, 노동 현실을 뼈저리게 겪어서, 거기에다 그만의 특질인 발상의 기발함과 표현의 기괴함이 합쳐져서 민중시 같기도 하고 해체시 같기도 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것은 유홍준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유홍준의 시 세계에 접근할 때 '밑바닥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상가에 모인 구두들

유홍준 지음,
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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