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바닥 사건'을 아십니까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56>공장일기<34>

등록 2004.05.06 13:41수정 2004.05.0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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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면 그때 '쎄(혀)바닥 사건'이 자꾸만 떠오른다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바라보면 그때 '쎄(혀)바닥 사건'이 자꾸만 떠오른다 ⓒ 이종찬

"올개(올해)는 벨시리(별스레) 꽃이 많이 피네에~ 그라고 피는 꽃마다 색깔도 너무 이뿌고."
"봄에 꽃이 많이 피고 색깔이 디기(더) 아름다우모 사슴(가슴) 아푼 일도 억수로(많이) 생긴다 카던데..."



그랬다. 하얀 스카프를 쓴 조립부의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 말마따나 공장 철조망 안팎을 자유롭게 휘감아 오르던 장미가 유난히 붉게 피어나던 그해, 1985년 봄에는 조립부 안에서 또 한번의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미스 조립'이라고 불리던 그녀의 친구가 여성 노동자로서의 삶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진 뒤 조립부 안은 한동안 술렁였다. 그 술렁임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그러니까 조립부 여성 노동자들이 장미꽃처럼 빨간 스카프를 쓰고 화약 조립에 마악 들어갔을 때 검사 라인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한명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내가 어릴 적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는 초·중학교 후배였다. 나와는 네다섯살쯤 나이 차가 났던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마디미(창원 상남)에서 살고 있었다. 딸만 줄줄이 다섯이나 낳은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비록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눈웃음 치는 모습이 참 예뻤다.

"저 아(아이)는 오데(어디) 빠지는 기 없는 기라. 인사성도 밝제, 키도 크제, 그라고 얼굴도 울매나(얼마나) 이뿌노. 딱 한 가지 흠이 있다카모 핵교(학교)를 제대로 못 댕긴 거뿐이라카이."
"그기 머슨(무슨) 큰 흠이 되것나. 예로부터 셋째 딸내미(딸)는 선도 안 보고 데리고 간다꼬 안카더나?"


근데 그런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니. 나로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조립부에서 그녀와 함께 일했던 동료 여성 노동자들도 그럴 애가 아니라면서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조립부 간부들은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자살 소동에 대해 쉬쉬하며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다.


사연인즉, 지난 일요일 조립부 검사 라인의 여성 노동자 모두가 간부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가까운 진해로 야유회를 갔다고 했다. 오랜만의 바깥 나들이여서 그런지 그날 참석한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들은 몹시 들뜬 상태였다고 했다. 그리고 간부들이 권하는 술도 몇 잔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까지 추었다고 했다.

모처럼 흥겨운 하루였다. 오후가 되자 술 취한 간부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곁으로 다가와 은근히 치근덕거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빨간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를 예쁘게 차려입었던 그녀 또한 간부들이 집중적으로 권하는 술 때문에 약간 취한 듯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었다고 했다.


사고는 야유회를 마치고 기차를 타면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간부들은 차량 한켠을 통째 빌리다시피 한 기차 안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노래하고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좌석에 앉아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 끌거나 허리를 감싸안아 억지로 일으키기도 했단다.

"계장님! 자꾸 내한테만 와서 와 이래예? 술이 많이 취하신 것 같네예. 인자 고마 하고 제발 이 손 좀 안 놓아 주실랍니꺼?"
"나는 니가 우리 조립부에서 제일 이쁘다고 생각해. 니만 보면 서울에 두고 온 우리 딸내미 생각이 자꾸 나거든."


평소에도 그녀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계장이 그날따라 유난히 그녀 곁에 찰거머리처럼 들러 붙어 자꾸만 술잔을 권하며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차가 철커덕거리며 휘어진 철로를 지날 때마다 일부러 그녀 앞으로 쓰러져 은근슬쩍 껴안으며 허리를 더듬기까지 했다.

그때 그녀는 몹시 화가 나 있었지만 직속 간부에게 밉보일 수가 없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마냥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계장은 자꾸만 그녀에게 몸을 기대며 거푸 술을 마셨다. 근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기차가 캄캄한 터널로 들어섰을 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옴마야!"
"쉬이~"
"…… 우욱! 퇘퇘퇘!"
"에이~ 좋으면서 왜 그래."
"딱!"


기차가 마악 터널을 벗어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에게 뺨을 얻어맞은 계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빙글거리고 있더니,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 아예 그녀를 거세게 끌어안아 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막무가내로 그녀의 젖가슴과 엉덩이를 마구 더듬기 시작했단다.

"옴마야! 저기 머슨(무슨) 난리고. 계장님이 고마 꼭지가 팍 돌아버린 모양이다야. 인자(이제) 저 일로 우짜것노?"
"하여튼 계장이고 나발이고…. 사내란 것들은 다 똑 같다카이."
"악!"


사고는 그때 일어났다. 그녀를 거칠게 마구 더듬던 계장이 다시 한번 그녀와 입을 맞추었을 때 비명 소리와 함께 계장의 입에서는 장미꽃 같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쌕쌕거리며 기차 탑승대로 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기차 밖으로 몸을 날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날, 그녀에게 혀를 물린 계장은 가차 안에서 말똥구리가 굴리는 쇠똥처럼 이리저리 마구 뒹굴다가 기차가 서자마자 산재병원으로 직행했다. 그녀는 철둑 주변 보리밭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되었다. 그렇게 자살을 시도한 그녀는 정말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지만 다리 한쪽을 영원히 못쓴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조립부 안에서는 그 사건을 '쎄바닥(혓바닥) 사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 '쎄바닥 사건'이 대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회사에서 그 문제를 일체 꺼내지 말도록 특별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쎄바닥 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쯤 지날 무렵 계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장에 출퇴근을 했으나 그녀의 모습은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희롱. 특히 직장에서의 성희롱은 요즈음 세상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공장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간부들에 의한 성희롱은 비일비재했다. 그것도 가벼운 성희롱 정도가 아니라 성추행이었다. 간부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손을 잡는 것과 은근슬쩍 끌어안는 것은 예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어느 누구도 간부들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저항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든 저런 일이든 일단 간부에게 대든다는 것은 곧 공장을 그만 둔다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간부들이 성추행을 해도 여성 노동자들은 "간지러워요"하며 은근슬쩍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공장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성희롱이라는 그런 단어조차 없었다. 그저 성희롱이든 성추행이든 성폭력이든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모든 책임은 애매한 여자에게로만 돌아갔다. 여자가 오죽 행실을 바르게 하지 않았으면 그런 수모까지 당하고 다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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