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종들이 선택한 민주노동당의 희망

브리뚜 알비스 지음 <브라질의 선택 룰라>

등록 2004.05.06 19:24수정 2004.05.1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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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는 바뀌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노동자당도 바뀌었다. (중략)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여쁜 여성들과 똑똑한 남성들의 특권이다. 그렇다고 노동자 당원들이여, 불안해 하지 말라. 우리 모두는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카멜레온이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이 말이 참 당당하게 느껴지지요. 지난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비약적인 성장을 보여준 브라질노동자당과 4수 끝에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된 브라질노동자당의 명예총재 룰라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자신감의 표현이 참 부럽네요. 저는 이 말이 장차 '권영길, 단병호도 바뀌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한다. 민주노동당도 바뀌었다'는 대중적 평가로 바뀌는 상상을 해봅니다.

지난 17대 총선이 낳은 단연 최고의 뉴스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었지요. 민주노동당을 찍은 저에게는 특히 그랬답니다. 극우 보수 일색의 한국 정치판이 뒤바뀌기 시작한 역사적 쾌거로서, 또는 장외의 재야 세력에서 제도권 정치 세력의 진입으로 여러 가지 의미 부여와 해설이 뒤따르더군요. 언론 보도를 보자니 총론격으론 민주노동당에 축하와 기대를, 각론에서는 민주노동당 '변수' 혹은 '리스크'라고 부르며 각종 염려와 걱정을 쏟아놓더군요.

선거 직후에 '50년간 빼앗긴 지갑 드디어 찾았습니다'라는 재치 있는 현수막을 내걸고 '2012년 집권, 꿈은 이루어진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민주노동당으로선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이겠지요. 아직도 감격과 희열이 채 가시지 않았겠지만, 창당 4년의 신생 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 가야 할 길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21세기 대전환기의 익스트림 어드벤처의 전무후무한 길일 테니까요.

민주노동당의 앞길에 이 책이 참고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금속노동자 룰라의 성장 과정(1~2장)과 브라질노동자당의 역사(3~4장) 그리고 2002년 '룰라, 평화와 사랑' 캠페인과 룰라 연합정권의 국정 청사진(5~7장)을 담고 있지요. 하지만 달리 읽으면 이렇게 읽힌답니다. 조합주의적 성격이 강했고 사상적 통일이 안된 잡다한 구성으로 출발한 군소정당 브라질노동자당이 어떻게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대중정당으로 성장했는지, 그 변화무쌍한 과정을 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책이지요.

"노동자당 내부에 모여 있는 여러 분파들의 성향을 보면 정치색이 없는 순수 박애주의자 사회운동가들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적 개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회·민주적 성향의 인사들과 사회민주주의 및 혁명적인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인사들까지 모두 망라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구조가 나를 놀라게 했다."


이런 잡동사니 브라질노동자당과 비교하면 언론에서 흔히 민주노총, 전국연합, 진보정당추진위로 분류하는 민주노동당의 정파 구성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앞으로 민주노동당도 성장을 거듭할수록 더욱 다양한 신념과 뒤섞이고 여러 세력과 함께 해야 할 테니 브라질노동자당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브라질의 경우 정치적 동맹은 뿌리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브라질 국민은 결코 싸우길 좋아하는 투사가 아니었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는 거리가 먼 민족이었다."


물론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에서 정치적 동맹의 뿌리는 어느 정도인지, 한국 국민은 혁명과 얼마만한 거리를 유지하는 민족인지 분석해 보아야 할 겁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가야 할 승리의 길은 무수한 정치적 동맹의 성사에 달려있고 혁명이 아닌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공감하시는 분이라면, 브라질노동자당은 좋은 사례가 될 겁니다.

""룰라도 브라질의 그런 역사적 흐름에 합류하였다. 그리고는 당선되기 위하여 유권자들의 저항과 태생부터 지니고 있던 극단주의를 초월하면서, 이전에 연마한 인내와 협상 그리고 공존의 '예술'을 이용하여 타 당과의 동맹을 멋지게 일구어 내었다."

반면 지지자들의 높은 기대와 반대자들의 깊은 우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민주노동당은 벌써부터 좌우의 만만치 않은 압력에 직면해 있더군요. 오른편에선 '민노당은 외국 투자자의 우려를 읽어야 한다'며 국가의 공익을 고려하라는 주문을 시작했고, 왼편에서는 '어느덧 대화와 타협 운운하는 보수정당의 논리에 옷을 맞추려 하고 있다'며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을 역설하고 있으니까요.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이 겪어온 고통과 희생을 떠올리고, 그들의 힘을 기초로 이룩한 정치 세력화의 첫 발이 갖는 의미를 감안한다면, 민주노동당이 갖는 노동자의 뿌리를 희석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그 어느 정당도 자신의 출신을 용기 있게 드러내지 못하는 한국의 비겁한 정치 풍토에서 민주노동당이 갖는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굽혀서는 안되리라 봅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 시대의 진보 이념을 예전처럼 전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과 어휘가 없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다기한 수준의 진보적 가치를 학습하고 포용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합니다.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무엇보다 진성 당원의 핵심적 기반 위에서 더욱 많은 신뢰를 획득하고 더욱 다양한 이해를 위탁 받으면서 대중정당으로 성장하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표현대로 50년간 빼앗겼던 지갑을 되찾았으니 이제는 지갑의 신용을 두툼하게 만들어 가는 숙제를 갖게 된 셈이라고 할까요. 민주노동당의 지갑은 노동조합에 기반하지 않은 여타 집단과 개인의 마음도 함께 담아야 할 테니까요. 독자적 정치 세력화의 물꼬를 연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포부대로 2012년 집권의 꿈을 향해 여러 수준의 정치적 제휴와 동맹과 연정을 통해 풍부한 관계의 기술을 터득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저는 민주노동당이 내부적으로 '순수한 통일'이나 '단일한 결사'를 추구하지 않기를 바란답니다. 순종을 지향하는 어떤 사상, 이데올로기, 이념의 유혹에도 굴하지 말고 외부와의 부단한 교접을 통해 잡종 강세의 진화 법칙을 증명하는 멋진 정당이 되기를 바랍니다. 민주노동당이 획득한 정당 지지율 13%의 민심에는 특정한 주의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고 하기 싫어하는 무수한 잡종들의 희망도 함께 실려 있으니까요.

갑자기 옛날 일이 기억나네요. '사노맹'의 박노해씨가 구속되었을 때 <한겨레>신문에는 소설가 하일지씨의 글이 실렸었지요. 사회주의자 박노해씨가 사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잡혀가니 곧 있으면 자유주의자인 자신도 잡혀갈 것 같아 박노해씨의 구속을 반대한다는 요지였지요. 비슷한 무렵 소설가 마광수씨가 구속되었지요. 그때 저는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구명운동을 벌였어야 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자유주의자가 숨을 못 쉬면 사회주의자도 숨을 못 쉬는 세상일 테니까요.

지나간 일입니다만, 꿈만 같았던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지켜보면서 당시의 하일지씨와 마광수씨가 지지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아예 당원이 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에 빠져봅니다. 잡종 정당 브라질노동자당의 룰라를 소개한 이 책을 통해 자꾸 이런 궁리들만 늘어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런 상상은 해도해도 참 즐겁습니다. 잡종 정당 민주노동당이 펼쳐 가는 무지개 희망의 정치….

참, 이 책과 더불어 조절 이론의 대가 알랭 리피에츠의 <녹색 희망>이라는 책을 같이 권해 봅니다. '아직도 생태주의자가 되길 주저하는 좌파 친구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요. 저는 이 책 역시 유럽의 녹색당이 보여주는 잡종 강세의 좋은 사례로 읽었습니다. 지은이는 다양하게 분화된 현대의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의 상충하는 희망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치적 생태주의를 주장하지요. 함께 읽어볼 만합니다.

남미 대륙의 한복판에서 브라질노동자당이 보여준 대중정당으로의 꾸준한 성장의 교훈을, 유럽 대륙 곳곳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녹색당의 생태주의적 정치의식의 부단한 확장을, 한국의 민주노동당이 개척해갈 전대미문의 앞길에 선물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저 같은 잡종들은 변화하고 또 변화하는 민주노동당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놓지 않을 테니까요.

브라질의 선택 룰라

브리 뚜 알비스 지음, 박원복 옮김,
가산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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