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교수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매우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서책이다. 그는 서책의 제목을 통하여 이미 자신의 집필의도를 단적으로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앞에 자리한 수식어 '당신들의'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의 관점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서책의 저자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노자는 한국에 귀화한 러시아인이다. 따라서 그는 한국인이며 동시에 러시아인이고, 러시아인이되 또한 한국인이다. 하지만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그는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우리들'의 중독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최대한도의 객관성 확보를 위한 냉정한 시도를 과감히 꾀하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로, '당신들'과 '나(박노자)'의 변별점을 강력히 희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결석한 당신들의 나라 대한민국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되, 그런 작업을 온전히 '나만의' 고유한 시각에서 출발하여 마무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천명으로 수식어 '당신들의'는 독해된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제목으로 보건대 매우 주관적인 서책이기도 하다.
셋째로, '당신들의' 수식어에서 풍겨 나오는 부정과 비난의 어조를 감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앞과 '당신들의' 뒤에 박노자가 '그 잘난'이란 두 번째 수식어를 덧붙이고 싶어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나는 강하게 받았다. 이질적인 두 언어와 문화에 정통한 박노자가 대한민국 사회를 향해 비수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비난과 비판이 제목에서 이미 시나브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이전에 '대한민국'은 대중화되지 않은 상당히 낯선 용어였다. 그러던 것이 엇박자와 어울린 구호 '대~한민국!'으로 생생하게 살아나 이제는 매우 친숙한 용어로 우리 곁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박노자는 이 서책이 초판된 2001년에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선진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것이 그저 단순한 우연일까, 생각해본다.
한국과의 인연을 짤막하게 다루는 머리말 이후 박노자는 모두 4부에 걸쳐 우리사회 곳곳에 대한 해부와 비판의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제1부 한국사회의 초상, 제2부 대학, 한국사회의 축소판, 제3부 민족주의인가 국가주의인가, 제4부 인종주의와 대한민국. 이런 소제목은 지금 한국사회가 처해있는 부정적인 면면들의 집중된 처소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제1부 '한국사회의 초상'에서 박노자는 독재자 박정희를 여전히 숭배하고, 미국과 유럽의 가치를 맹종하는 한국적 '오리엔탈리즘'이 횡행하는 한국사회를 통렬하게 질타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는 북한사회를 맹목적으로 폄하하고 비난하는 대한민국의 보수언론이 보여주는 권력세습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남한 보수언론이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은 북한의 대권세습을 열심히 비웃으면서도 남한의 거의 모든 재벌이 2세, 3세에게 소유와 경영을 세습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일처럼 보도한다는 것이다. 사립학교에서 설립자나 소유주의 자녀와 가족이 누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권력은 아예 보수언론의 관심 밖이다." (제1부, 75쪽).
한국의 보수언론 역시 재벌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대물려 상속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세습적인 보수언론사들이 여타의 재벌기업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당긴다든지, 그 문제를 남한사회 공론의 마당으로 끌고 나올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아니라면, 어떻게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예수의 희생과 톨스토이의 철학을 기초로 박노자는 폭력에 대한 끝없는 부정과 자비에 대한 가없는 예찬을 내세운다. 이른바 '연평해전'과 '서해교전'에서 죽어간 북한병사 30여명의 고통을 헤아리자는 그의 주장은 '사형제도 폐지'로까지 연결되면서 문제의식의 확장과 심화로 연결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내재된 보편성의 일환이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서책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대목은 제4부 첫머리에 나오는 '서울의 이방인'이다. 여기에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소재한 대학교에서 시학과 문학이론을 가르치는 전임강사로 근무했던 '바트자갈'이 낯설고 물선 대한민국 사회로 들어선 1997년 이후 경험한 고통스럽고도 쓰라리며 가슴 아린 사연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몽골이 필요로 하는 '진지한 근대'를 '경제-사회의 기적을 일으킨 대한민국에서 찾으려 하였던 바트자갈에게 한국은 '선진화의 길잡이'로 보였다고 박노자는 기록한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하였던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한 바트자갈이 보따리 장수들의 삐끼가 되고, 월급의 30%를 떼어먹히는 기막힌 인생유전의 드라마가 대한민국 사회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막을 올린다. 그 후 러시아어 교습, 손 세차 주유소 노동자, 충남의 김치공장 노동자, 세탁 노동자 등으로 한국사회 구석구석을 전전하면서 피부와 언어와 인종차별을 뼛속깊이 겪은 사연이 구구절절 서술된다.
그런데, 박노자가 보기에 수난자 바트자갈은 인생의 비의를 깨우친 선각자이자 증오와 미움을 버리고 선린과 공생의 전도사로 우뚝 서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쓴다.
"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는 목사, 신부, 승려를 많이 보았지만, 인간으로서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이 대목을 몸으로 행하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고통이 낳은 지혜의 덕분인지, 바트자갈은 그 이상에 상당히 접근했다… 그는 "원망으로는 세상의 악순환을 절대 끊을 수 없다"는 <법구경>의 말을 아직도 실천하고 있다." (제4부, 265-266쪽).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이제는 인종주의에까지 깊이 물든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성찰과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21세기 '전지구적인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망각되지 않을 교훈을 선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몽골 지식인 바트자갈의 다음과 같은 잔잔한 지적으로 다시 한 번 살아난다.
"민족과 국적이 너무 우스운 개념 같아요. 핏줄이 달라도 나를 살려주고 믿어주는 친구가 있는 나라를 나는 이미 '남의 나라'로 볼 수 없죠… 사람들이 왜 겉만 보고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 씨족과 부족의 구분이 없어졌듯이,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소멸될 날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죠." (제4부, 263쪽)
결국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모순과 부조리, 결함과 한계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그것을 '우리들의' 세계보편의 문제로 승화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인이자 러시아인인 그에게 고유한 두 문화와 언어에서 기인하는 모순적인 창과 방패의 양면성이 이룩한 유쾌하고도 놀라운 성취에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낸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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