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농사꾼의 격양가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 - 텃밭 두둑에 비닐을 덮으면서

등록 2004.05.08 19:08수정 2004.05.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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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에는 봄 가을이 짧다고 한다. 지금 한창 봄이 흐드러진 계절이지만 아직도 안흥 산골마을에는 아침이면 살얼음이 언다.


밭두둑에 비닐을 씌우는 필자
밭두둑에 비닐을 씌우는 필자박소현
아직 한해를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 산골마을에는 여름도 짧고 겨울은 엄청 길다고 한다.

지난 4월 15일, 밭을 갈아엎고는 아직 밭에다 파종을 하지 않았다. 이웃 농사꾼 노씨의 말이 여기는 다른 곳보다 보름이나 한 달 이상은 늦게 모종을 내거나 씨앗을 뿌려야 된다고 했다.

아직 주민등록을 안흥으로 옮기지 못해 지난번 총선거 날 투표를 하고 이튿날 내려오다가, 밭에다 심으려고 횡성 장에 가서 고구마 순을 샀으나 아직 밭에 내기가 이르다고 해서 뜰에 두었다가 그만 얼려버렸다.

그런데 시골의 밭을 지나면서 유심히 보면 요즘은 전국 어디나 죄다 밭두둑을 비닐로 덮고 거기다가 구멍을 뚫고 씨앗을 심거나 모종을 내고 있었다.

그 영문을 알아봤더니 비닐을 덮지 않으면 잡초 때문에 김 매는데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과 비닐을 덮으면 보온도 되고 가뭄도 덜 타기에 이 즈음은 너나없이 모두 비닐을 씌운다고 한다.


내 집 텃밭이 얼마 안 되지만 기왕에 농사를 짓기로 하였으니 격식을 갖춰 비닐을 덮기로 했다. 비닐 덮는 일을 노씨에게 연수를 받고자 몇 날을 벼르다가 어제야 서로 시간이 맞아서 현장 실습을 마치고 오늘은 아내와 함께 비닐을 덮기로 작정했다.

밭고랑의 흙으로 비닐을 덮고자 괭이질하는 아들
밭고랑의 흙으로 비닐을 덮고자 괭이질하는 아들박소현
그런데 간밤에 딸 아들이 왔다. 주말인데다가 오늘이 어버이날이라서 온 모양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수록 만남의 반가움도 큰 모양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혼자서 밭두둑에 비닐을 덮고 있는데 아들이 나와서 도왔다.


부자가 같이 일을 하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혼자 속으로 “얘, 너 서울 가지 말고 그만 예서 같이 지내자”라고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이 텃밭도 빌린 땅이요, 이 산골에 내 땅 한 뼘도 없이, 게다가 얼치기에다 신출내기 농사꾼이 농사를 지어서 우리 네 식구가 어찌 생계를 이어가겠는가.

그는 그가 가야할 길이 있고,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는데, 내 욕심으로 어찌 그가 가는 길을 틀 수 있으랴.

몇 두둑에 비닐을 씌우자 허리도 아프고 게으름이 났다. 남의 일은 다 쉽게 보일지라도 막상 해 보면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농작물을 가꾸는 농사꾼들의 고된 일을 조금은 이해가 됐다. 이렇게 애써 가꾼 농작물을 제값이라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옆집 농사꾼 노씨 부부
옆집 농사꾼 노씨 부부박도
가뭄으로 또는 수해로 다 된 농사를 망치기 일쑤고, 그해 풍작이 되면 값이 폭락해서 품값도 나오지 않아서 그대로 밭에 갈아엎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모두 농촌을 떠나고 노인만 남아 있다.

내가 사는 마을 세 가구도 모두 50대 이상의 중늙은이 여섯 사람이 살고 있다. 나야 소일삼아 텃밭을 가꾸지만 큰 노씨는 농사에 생계를 걸고 있다(이웃 두 집은 모두 노씨로 사촌간이다. 작은 노씨는 가축도 기르고 트럭으로 운송도 하고 다른 장사도 한다). 농촌에 젊은이와 아이들이 득시글거릴 때 나라가 균형있게 발전하리라.

모처럼 쉬는 날 부모를 찾아온 아이에게 밭일만 시키는 게 미안하기도 해서 점심 핑계로 중단하고, 남은 일은 다음날 나 혼자 쉬엄쉬엄하기로 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고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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