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시절(8~9세)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그때 일에 대해 전해지는 한 예화가 있다. 구상이 여덟 살에 그곳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등교 첫날 그의 옷을 보고 전교생 놀렸다. 소학교생인 구상이 양복을 입고 '란도셀'(책가방)을 메고 갔는데 그곳 아이들의 눈에는 우체부로 보였다. 그 이튿날부터는 한복차림으로 나서는데, 어머니가 우겨서 '목세루'(면직물) 두루마기를 입고 책보를 들고 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들은 꼬마신랑 같다며 '알서방'이라고 놀려댔다.
신학교 중등과 시절과 대학시절
구상은 열다섯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만에 환속을 했고, 일반 중학으로 진학했으나 퇴학을 당했다. 마을에서는 주의자(主義者)라며 구상을 낙인찍었다. 그 당시 주의자는 '사상가'라는 뜻보다는 '그 사람 버렸다'는 뜻이 농후했다고 한다.
구상은 몸과 마음을 둘 곳이 없어 고향을 떠난다. 그후 노동판 인부 노릇도 하고, 야학당 지도도 하며 지내다가 동경으로 떠난다.
동경에 간 구상은 처음 몇 달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급 노동자로, 또는 연필공장 직공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선배의 권유로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시험을 쳐 두 군데 모두 합격했다. 그 가운데 그가 선택한 것이 종교과였다.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
구상에게 한평생 삶의 지침이 되고, 좌우명이 된 말씀은 아버지의 유훈과 형의 교훈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구상을 불러 "너는 매사에 기승(氣勝)을 하지 말라! 아무리 의롭고 바른 일이라도 기승을 하면 위해(危害)를 입느니라"며 채근담(菜根譚)을 손수 펼쳐 짚어 보이셨다.
감성일푼편초탈일푼(感省一分便超脫一分) "조금 줄여서 사는 것이 조금 초탈해 사는 것이니라".
절망의 극한적인 상황 속에 있던 20대 구상에게 신부인 형은 아시시 프란체스코 성인의 말씀으로 위로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내려 주신 모든 은혜를 도로 거두어 도둑들에게 나누어 주셨더라면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감사를 받으실 것을…"
원산문학가동맹과 응향(凝香) 필화사건(筆禍事件)
구상이 일본 동경에서의 학생 생활을 끝낸 것은 1941년이었다. 귀국 후 북한 함흥에 <북선매일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1946년초 원산의 문학도들은 원산문학가동맹을 발족했다.
당시 신문 지면이나 동인지에 작품을 발표했던 구상은 자동적으로 문맹 일원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조직사업이나 선전행사는 외면했다.
그 무렵 원산문예총 위원장으로부터 해방기념 시집 발간에 작품을 제출해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받았다. 그는 ‘여명도’‘길’‘밤’ 등의 작품을 제출했다. 그 시편들을 모아 시집 <응향>을 출간했다. 그 시집의 장정(裝幀)은 이중섭 화백이 맡았는데, 표지 그림은 군동상이었다.
이 글을 발표한 직후 북한의 신문과 방송은 <응향>을 규탄하는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현지 원산을 비롯한 각 지방 동맹에 총체적인 검열 사업을 벌였다.
백인준의 논평은 <음향>에 대해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주아적이요, 반역사적이요, 반인민적이요" 등등의 수식을 붙였다.
구상은 그 필화사건으로 1947년 2월에 탈출, 월남하였다. <응향>사건은 남로당계 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3호에 대서특필 전재되었고, 이에 대하여 민족진영에서 김동리씨를 비롯해 조연현, 곽종원, 임긍재씨 등이 반론 항의에 나섰다.
구상은 최태응씨가 편집하던 <해동공론>에 북조선문학여담이란 제목으로 사건 경위를 발표하게 되었고, 당시 우익진영의 유일한 문학지인 <백민:白民>에 '발길에 채운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와'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서울 문단에 입참하게 됐다.
왜관에서 낙동강 등 소재로 왕성한 시작활동
1953년부터 왜관에 정착하면서 74년까지 낙동강을 소재로 왕성한 시작(詩作)활동을 했다.
칠곡군은 21년간 왜관에 본적을 두고 활동해 온 우리나라 문단의 거목 구상 시인의 문학관을 2002년 10월 개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