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땅을 사겠다고 합니다

‘넉넉한 생활 자금’ 때문에 아내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습니다

등록 2004.05.11 23:17수정 2004.05.1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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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내는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돈벌이에 어지간히 인색했던 고집불통의 남편이 한동안 중단했던 다큐멘타리 방송 원고를 한 달에 한 편씩 꾸준히 썼고, 또 책까지 내서 약간의 인세도 받았습니다.


홀쭉했던 저금통장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불룩해졌습니다. 다들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몇 백만 원을 모은 것입니다. 한 달 생활비가 간당간당 했던 지난해 이맘때를 생각하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돈벌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넉넉한 생활 자금’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그 돈으로 땅을 사자는 것이었습니다.

a 여름으로 가는 우리집 전경

여름으로 가는 우리집 전경 ⓒ 송성영

"우리도 이제 돈 좀 더 모아서 땅 좀 사자."
“갑자기 땅은? 고게 얼마나 된다구 땅을 산다구 그려….”

“좀 더 모으면 몇 만 원 짜리 싼 땅 100∼200평 쯤은 살수 있잖아, 나중에 거기다가 집도 지을 수 있고….”
“욕심부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겨.”

“그게 무슨 욕심이야, 비싼 땅도 아니고 산골짜기에다가 그저 우리가 눌러살 만한 아주 싼 땅을 장만하겠다는 것인데….”


사실 아내의 욕심은 나름대로 정당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직 우리에겐 단 한 평의 땅도 없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애들하고 또 노후를 위해서 오두막집이라도 지을 수 있는 땅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노후는 무슨….”


아이들을 위해서, 노후를 위해서라는 말에 잠시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처음 100∼200평의 욕심이 300평, 500평이 될 것이고, 1000평이 될 것이 분명할 테니 말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에이, 무슨 소리여, 그만둬, 땅은 무슨 땅여!”
“왜 자꾸 화를 내고 그래.”

“그 돈, 써야 할 데가 있어.”
“당신이 돈을? 어디에다가 쓰려고 그러는데….”
“이번에 방송 일 그만 둘 거야.”

가장 큰 밥줄인 방송 일을 그만 둔다는 말에 아내의 얼굴색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아내가 땅을 사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 역시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우리 가족이 반 년 이상은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방송 일을 접어두고자 했습니다.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그 말을 언제 꺼낼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땅을 내세워 선수를 쳤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요즘 불과 1년 전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시간에 쫓겨야 했습니다. 통장에 돈이 채워지는 만큼 허리 아프도록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다녔던 산행도 대충대충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전처럼 식구들과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돈이 통장에 모여진다 한들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봄이 오면 스트레스만 쌓이게 되는 방송 일을 그만두고자 벼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놀고 먹겠다는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방송 원고에 비해 돈벌이가 턱없이 적겠지만 쓰고 싶은 원고를 뱃속 편하게 쓰면서 좀 더 밭일을 늘려 나갈 요량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 가서 고사리를 비롯한 산채를 실컷 뜯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그러는데 제주도에서 한 달 정도 산채와 고사리를 부지런히 뜯으면 200∼300만 원은 거뜬히 벌 수 있다고 합니다.

고사리에 산채 뜯는 일이 몸에 부대낄지 모르지만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참 좋을 것 같았습니다. 생활비도 넉넉히 벌 수 있다고 하니 금상첨화였습니다.

그렇게 즐거운 돈벌이를 상상하면서 아내가 땅을 사겠다고 벼르고 있는 동안, 나는 통장 속의 그 몇백만 원을 여유자금으로 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로 땅을 사게 되면 결국 나는 방송 원고를 계속 써야 할 처지였습니다.

a 부엌에서 바라본 장독대. 마찬가지로 화창한 봄과 여름 사이에 놓여져 있습니다.

부엌에서 바라본 장독대. 마찬가지로 화창한 봄과 여름 사이에 놓여져 있습니다. ⓒ 송성영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방송국에 가던 날 나는 아내에게 짐짓 ‘협박조’로 말했습니다.

“예전처럼 돈벌이를 위해 살지 않을 거다.”
“누가 아파트에서 살 때처럼 살자고 했나, 우리도 이제 중년인데 노후도 생각해야지.”

“헤, 중년? 헤헤, 그라고 보니께 우리도 중년이네?”
“그럼 중년이지, 40대 중반인데…."

“그렇다고 고런 걱정하면서 세월 보내고 싶지 않네. 당신도 사람덜 한티 그랬잖어. 돈 한푼 빚진 거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말여. 지금 걱정 없으면 노후도 걱정할 거 없는 거여. 그동안 땅 한 평 없었어도 끄떡없이 잘 살고 있잖어”

“에이그, 또 그런 소리.”
“오늘 방송국에 가서 그만 두겠다고 말 할 거다. 그런 줄 알고 있으라구.”

"…….”
“지난해 이맘때를 생각해 보라구.”

사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통장에는 한 달 생활비 60만 원 정도가 겨우 남아 있곤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돈 때문에 다투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생활비 걱정하지 않고 철없는 소녀처럼 들꽃 그림을 그렸고, 나는 쓰고 싶은 원고를 썼습니다. 큰 돈이 되지 않는 원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단편적인 원고들이 묶여서 책으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우리 네 식구 한 달 생활비의 두 배에 가까운 원고료를 받을 수 있는 방송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계획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아내에게 '비우면 채워진다'는 말을 수없이 남발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깨에 힘 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비우면 채워진다는 말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니까요.

방송국에 원고를 마감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의 표정은 무척 어두워 있었습니다. 나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 곁에 바싹 다가가 말했습니다.

“에이그, 그만 뒀을까봐? 내가 방송 일 그만 두는 걸 당신이 편하게 받아들일 때까지 더 다니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방송 일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아내의 마음이 불편하면 내 마음 또한 편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이들을 포함해 우리 네 식구 모두가 괴로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내게도 조건이 있어, 일단 땅 사는 건 접어두기로 하는 겨…."
“그래 좋아,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준비해야 되잖아.”
“언젠가 꼭 필요하면 생기겠지….”

뱃속 편하게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자고 말했지만 가슴 한 쪽이 허전했습니다. 나 또한 언젠가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필요 이상의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만 먹고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게 말처럼 잘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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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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