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아 이렇게 누래지는 때 보리밭이 흔들리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우리 같은 동네 꼬마 녀석들이 보리를 꼬실라 먹으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시기한 일이 벌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 땐 아무 것도 몰랐다. 지금은 보리밭이 없어서 문제가 많지만.김규환
한 친구는 보리밥이 싫다고 한다. 배고팠던 시절이 생각 나기 때문이라나. 농사 그리 지어도 쌀밥은커녕 꽁보리밥마저 먹기 힘들었고 먹은들 방귀만 피식피식 나왔으니 오죽하겠는가.
이모작을 했으니 논밭 8할이 보리밭이었다. 그 중 2할은 밀로 채워졌던 70년대 고향 뜰은 서럽게 아름다웠다. 보리밭 밟고 잡초 매느라 봄날 따사로운 햇볕에 그을려갔다. 웬수같은 '볼태기' '독새기' '보지감자' 매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보리가 아이 만큼 크면 보릿대 하나 쑥 뽑아든다. 매듭 한개 붙여 잘라, 줄기 따라 날카로운 칼집 살짝 내 달짝지근한 물 쪽쪽 빨고 "부우~ 부부" 보리 피리 불며 놀았다.
배동이 불룩해지며 보리 이삭이 팬다. 뜨물이 차고 오동통 까만 줄그어진 알맹이를 감싸고 보리 까시락도 쭈뼛쭈뼛. 푸르스름하던 껍질 무지개 빛을 띤다. 생으로 보리나 밀을 비벼 껌으로 씹어 본다.
차차 누렇게 익어 가면 꼴 베러가던 참에 '비사표' 사각통 성냥집 한쪽 뜯어 골 대여섯 개 챙겼다. 행여 물에 젖을까 종이에 꼬깃꼬깃 싸 옷핀 찔러 주머니에서 빠져 나오지 않게 채비를 한다.
혼자서 감행했다가 무슨 날벼락 맞을지 모르는지라 두셋이 한짝이 되었다. 논 한가운데로 살금살금 기어가 보리 서리 해 오는 재미는 스릴 그 자체다. 망 보던 아이들은 냇가에 말라 비틀어져 걸려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모아 불 피울 준비를 한다.
"야! 일로 와봐라. 다 벼 왔당께."
“허벌나게 벼 왔다. 언제 다 묵을라고 그냐?"
"냉기믄 깔망태다 넣어 각고 가믄 되고, 걸리면 몇 대 맞아불면 되제. 죽이기까지 하겄냐?"
"글도 양심이 있제."
"야 색꺄? 피장파장이잖어? 이왕 먹을 꺼 몽땅 먹고 맞는 게 낫제 쥐꼬리맹키 쬐까 묵다 걸리면 억울하지도 않냐?"
"야야 그만 허고 얼렁 꼬실라 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