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 꼬실라 먹던 깜실이들

까만 얼굴과 하얀 이, 보리 서리로 배 채우던 기억

등록 2004.05.17 16:07수정 2004.05.1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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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아 이렇게 누래지는 때 보리밭이 흔들리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우리 같은 동네 꼬마 녀석들이 보리를 꼬실라 먹으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시기한 일이 벌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 땐 아무 것도 몰랐다. 지금은 보리밭이 없어서 문제가 많지만.
멀리서 보아 이렇게 누래지는 때 보리밭이 흔들리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우리 같은 동네 꼬마 녀석들이 보리를 꼬실라 먹으려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시기한 일이 벌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 땐 아무 것도 몰랐다. 지금은 보리밭이 없어서 문제가 많지만.김규환
한 친구는 보리밥이 싫다고 한다. 배고팠던 시절이 생각 나기 때문이라나. 농사 그리 지어도 쌀밥은커녕 꽁보리밥마저 먹기 힘들었고 먹은들 방귀만 피식피식 나왔으니 오죽하겠는가.


이모작을 했으니 논밭 8할이 보리밭이었다. 그 중 2할은 밀로 채워졌던 70년대 고향 뜰은 서럽게 아름다웠다. 보리밭 밟고 잡초 매느라 봄날 따사로운 햇볕에 그을려갔다. 웬수같은 '볼태기' '독새기' '보지감자' 매느라 허리가 휘어졌다.

보리가 아이 만큼 크면 보릿대 하나 쑥 뽑아든다. 매듭 한개 붙여 잘라, 줄기 따라 날카로운 칼집 살짝 내 달짝지근한 물 쪽쪽 빨고 "부우~ 부부" 보리 피리 불며 놀았다.

배동이 불룩해지며 보리 이삭이 팬다. 뜨물이 차고 오동통 까만 줄그어진 알맹이를 감싸고 보리 까시락도 쭈뼛쭈뼛. 푸르스름하던 껍질 무지개 빛을 띤다. 생으로 보리나 밀을 비벼 껌으로 씹어 본다.

차차 누렇게 익어 가면 꼴 베러가던 참에 '비사표' 사각통 성냥집 한쪽 뜯어 골 대여섯 개 챙겼다. 행여 물에 젖을까 종이에 꼬깃꼬깃 싸 옷핀 찔러 주머니에서 빠져 나오지 않게 채비를 한다.

혼자서 감행했다가 무슨 날벼락 맞을지 모르는지라 두셋이 한짝이 되었다. 논 한가운데로 살금살금 기어가 보리 서리 해 오는 재미는 스릴 그 자체다. 망 보던 아이들은 냇가에 말라 비틀어져 걸려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모아 불 피울 준비를 한다.


"야! 일로 와봐라. 다 벼 왔당께."
“허벌나게 벼 왔다. 언제 다 묵을라고 그냐?"
"냉기믄 깔망태다 넣어 각고 가믄 되고, 걸리면 몇 대 맞아불면 되제. 죽이기까지 하겄냐?"
"글도 양심이 있제."
"야 색꺄? 피장파장이잖어? 이왕 먹을 꺼 몽땅 먹고 맞는 게 낫제 쥐꼬리맹키 쬐까 묵다 걸리면 억울하지도 않냐?"
"야야 그만 허고 얼렁 꼬실라 묵자."

이 쯤에서 사나흘 지나면 제일 맛 있을 때입니다. 그립습니다. 그 때 그날이. 올 봄 초에 보니까 순천낙안 읍성에 가니 보리밭 즐비하던데 혹시 익었는가 모르겠네요. 이번 주말은 너무 늦지는 않으려는지.
이 쯤에서 사나흘 지나면 제일 맛 있을 때입니다. 그립습니다. 그 때 그날이. 올 봄 초에 보니까 순천낙안 읍성에 가니 보리밭 즐비하던데 혹시 익었는가 모르겠네요. 이번 주말은 너무 늦지는 않으려는지.김규환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고 나뭇가지를 집어 넣으니 연기도 내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아직 푸른 줄기를 잡고 한줌 널찍하게 펴서 불에 갖다대면 "타닥타닥!" 곧 고소한 내음이 코를 찌른다.


"아따 막 갖다 대불면 다 타불제~"
"한삐짝으로 떨어져서 찬찬히 구워야제 고로코롬 하믄 쓰겄냐?"
"요렇게야?"
"잉~."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우면 모가지가 대롱대롱. 초벌 구워지면 불구덩이에 모아서 뜸들이듯 더 익힌다. 겉 껍질은 까맣지만 속은 멀쩡하다.

눈치 3단 해섭이가 잽싸게 사그라진 불 위에서 잘 익은 다섯개를 나무 막가지로 "툭툭, 틱틱" 끄집어내 손에 올려 “후~후-훗!" 불어댄다. 뜨끈뜨끈한 보리를 양손 사이에 넣고 몇 번 비벼댔다.

"후후~ 후~" 입을 가지런히 모으고 까시락과 보리 껍질을 분리한다. 겉이 까맣게 타거나 누르스름한 보리 알갱이가 가득하다. 검불을 마저 없애 입에 대고 입술에 뺨을 때리듯 "턱!" 털어 넣는다.

"야! 참말로 꼬습다."
"의리 지독히 없는 놈 같으니…. 너 꼰질러 분다."
"긍께 얼렁 한 번 묵어 보랑께!"
“흠냐 흠냐”

맛있게 한참 먹어댔다.

"얌마! 니 꼬라지가 뭐냐?"
"남 말하지 말고 이녁 얼굴이나 한번 보셔."
"깜둥이가 따로 없구만…."
"히히히히"

까만 얼굴과 하얀 이를 쳐다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냇가로 가서 얼굴과 입술을 씻으며 물 한모금 먹으니 배가 불렀다. 모래로 문질러 보고 쑥 뜯어 문대 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젠 누구네 보리를 베어다 먹었던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다음달에는 개구리 뒷다리나 먹어 볼까나.

야! 보리 꼬실라 묵자. 참 맛있었습니다. 서울에도 보리가 있답니다. 어린이대공원에 가면 보리밭이 2000평 정도 있어요. 한번 부탁해볼 작정입니다.
야! 보리 꼬실라 묵자. 참 맛있었습니다. 서울에도 보리가 있답니다. 어린이대공원에 가면 보리밭이 2000평 정도 있어요. 한번 부탁해볼 작정입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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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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