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들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오만가지 생각과 단순한 생각의 차이

등록 2004.05.19 12:37수정 2004.05.2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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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인상이는 토끼풀 꽃으로 야옹이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인상이는 토끼풀 꽃으로 야옹이 목걸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 송성영

야옹이는 오늘도 여전히 목에 토끼풀 꽃 목걸이를 걸고 있었습니다. 제 몸의 일부인양 폼나게 토끼풀 꽃 목걸이를 걸고 패션쇼 하듯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고 다닙니다.


때로는 잽싸게 몸을 놀려 돌담 위에 올라서기도 하고 '지 잘났다'고 쪼르륵 나무 위를 오르기도 합니다. 그래도 토끼풀 꽃 목걸이는 끄덕 없이 야옹이 목에 걸려 있습니다.

토끼풀 꽃을 목에 건 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넘어서자 토끼풀 꽃은 말라 비틀어져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옹이 목에는 여전히 토끼풀꽃이 걸려 있었습니다.

바로 어제였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작은 아이 인상이에게 토끼풀(클로버) 꽃으로 꽃시계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녀석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꽃시계였습니다.

"어? 아빠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나는 신기해하는 인상이에게 닭장 앞에 소복하게 올라온 토끼풀 꽃으로 꽃시계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토끼풀 꽃 아래 부분 줄기를 손톱으로 갈라 다른 줄기를 끼어 넣고 잡아당기면 아주 이쁜 꽃시계가 된다는 사실에 녀석은 무척 재미있어 했습니다.


a 닭장 앞에 토끼풀꽃

닭장 앞에 토끼풀꽃 ⓒ 송성영

우리는 여러 개의 꽃시계를 만들었습니다. 나도 차고 인상이도 찼습니다. 둘다 사이좋게 꽃시계를 차고 좋아라 웃어가며 주고 싶은 사람 것을 더 만들었습니다.

"이거 엄마 줘야겠다."
"나는 이 꽃팔찌, 형아 오면 줘야지."


녀석은 내가 '꽃시계'라고 몇 번이고 말했는데도 '꽃팔찌'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꽃시계보다는 꽃팔찌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녀석은 또 다른 꽃팔찌를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누구 거 만드는디?"
"야옹이 목걸이 만들어 주려구."

인상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야옹이입니다. 인상이 또한 집에 들어서자마자 야옹이부터 찾습니다. 가방을 멘 채로 한참동안 흙 마당에 퍼질어 앉아 야옹이와 놉니다. 둘 사이에 뭔가 주고받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가만히 들어보면 아무 대화도 오고가지 않습니다. 나는 장난기를 발동시켜 녀석에게 묻습니다.

"인상아! 야옹이가 뭐래?"
"…"
"야옹이가 뭐라고 하냐니까?"
"…"

인상이는 묵묵부답 흙 마당에 뒹굴거리며 토끼풀 꽃으로 만든 꽃 목걸이를 야옹이 목에 걸어줍니다. 꽃 목걸이를 다 걸어주고 나서 이번에는 꼬리에 토끼풀 꽃 리본을 달아줍니다.

a 인상이는 목걸리 뿐만아니라 야옹이 꼬리에도 토끼풀 꽃 리본을 달아주었습니다.

인상이는 목걸리 뿐만아니라 야옹이 꼬리에도 토끼풀 꽃 리본을 달아주었습니다. ⓒ 송성영

꼬리에 달아 멘 것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야옹이 녀석 스스로 끊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꽃 목걸이는 그대로 달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이틀째 야옹이 녀석은 인상이가 만들어준 토끼풀 꽃 목걸이를 달고 다녔던 것입니다.

인상이와 야옹이는 아주 특별한 사이입니다. 새벽 산행 길을 나설 때도 인상이만 졸졸 따라 갑니다. 나 혼자 산행을 나설 때는 따라오지 않습니다. 강아지처럼 인상이만 졸졸 따라 다닙니다. 야옹이 녀석은 산길을 한참 걷다가 지치면 인상이에게 바싹 붙어 "야옹 야옹" 거리며 안아달라고 합니다.

a 지난 봄 산책길. 야옹이는 인상이만을 따라 다닙니다.

지난 봄 산책길. 야옹이는 인상이만을 따라 다닙니다. ⓒ 송성영

얼마 전에는 인상이에게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보여줬더니(물론 남녀가 뱀처럼 뒤엉켜 있는 거시기한 장면이 나올 때는 애들 눈을 가렸지요) 당장 밖으로 나가 야옹이 꼬리에 물을 적셔 땅바닥에 글자를 새기기도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노스님이 고양이 꼬리를 붓으로 하여 '반야심경'(그렇게 기억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이 아닐지도 모릅니다)을 쓰는 장면을 보았거든요.

내가 꼬리를 잡으면 앙칼지게 뿌리치는 야옹이지만 인상이가 잡으면 다릅니다. 인상이에게는 제 꼬리를 한참동안 맡겨 둡니다.

야옹이와 인상이는 일방적인 주종 관계가 아닙니다. 인상이가 야옹이에게서 배우는 것도 있습니다. 야옹이가 나무에 올라가면 인상이도 따라 올라가려 합니다. 인상이가 집 앞에 서 있는 뽕나무를 곧잘 올라가는 것도, 높은 곳에서 가볍게 뛰어 내리는 것도 다 야옹이에게서 배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a 인상이가 나무를 잘 타는 것은 야옹이에게 배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상이가 나무를 잘 타는 것은 야옹이에게 배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 송성영

두 녀석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잘 놉니다. 가끔씩 인상이 손등에 야옹이 녀석의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때가 있습니다. 아내는 야옹이에게 눈을 부라리지만 정작 당사자인 인상이 녀석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나는 야옹이 녀석이 인상이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고의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야옹이 녀석이 인상이와 너무 친하다보니 놀이에 푹 빠져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를 고양이로 착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애정 어린 손톱을 세워 적당히 할퀴어도 상처를 입지 않는 고양이로 말입니다.

분명 인상이와 야옹이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인상이와 고양이는 말없이 놀고 있지만 녀석들이 서로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녀석들의 눈빛 속에는 둘만이 통하는 뭔가 신비로운 것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a 얼마전 두더쥐를 잡은 야옹이

얼마전 두더쥐를 잡은 야옹이 ⓒ 송성영

하지만 인상이와 야옹이 사이에 통하는 그 뭔가를 골몰히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은 '인상이와 야옹이 사이에는 그 어떤 신비한 것도 없다'였습니다. 그냥 서로 재미있게 노는 사이일 뿐입니다.

인상이는 야옹이에 대해 이런저런 오만 잡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야옹이를 좋아할 따름입니다. 야옹이 또한 자신을 좋아하는 인상이를 금세 알아차립니다. 자신을 좋아해 주니 잘 따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꾸만 뭔가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잔머리를 굴립니다. '야옹이가 손톱을 세우면 어떻게 하지?' '쥐를 잡아먹는 녀석이기 때문에 병을 옮기면 어떻게 하지?' '털이 달라붙으면' '털이 입에 들어가면' '산이며 들로 싸돌아 다니지만 1년 내내 목욕을 하지 않는 야옹이 녀석인데'

이래 저래 잔머리를 굴리니 복잡해집니다. 복잡한 마음자리에는 쉽게 통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상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 아이들은 이런저런 생각 없이 그저 그냥 야옹이를 좋아할 따름입니다. 마음자리가 아주 단순합니다.

a 말라 비틀어질때까지 토끼풀 꽃목걸이를 달고 다녔습니다.

말라 비틀어질때까지 토끼풀 꽃목걸이를 달고 다녔습니다. ⓒ 송성영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누군가와 놀고 싶어도 오만 가지 생각 때문에 쉽게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뿐이니 그 누구와도 쉽게 통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열 가지 생각을 맞추는 것보다는 한가지 생각을 맞추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니까요.

인상이와 야옹이가 서로 사이가 좋은 것은 단지 '재미있게 놀고 싶다'는 것 뿐입니다. 가끔씩 손등에 상처를 입지만 인상이는 그것조차 따지지 않고 오늘도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야옹이와 뱃속 편하게 잘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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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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