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 육교에서 매일 벌어지는 '아찔한 곡예'

용산역 주변 거주 장애인 등 교통 약자들의 '분단생활'

등록 2004.05.21 11:33수정 2004.05.2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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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일 꿈의 고속철이 운행을 시작했다. 수많은 잡음 속에서 출발한 고속철의 출발지 가운데 하나인 용산역. 고속철 개통과 함께 신축된 용산역사는 보기만 해도 첨단을 경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다. 올 9월이면 대형 할인마트가 문을 열 예정이다.

a 한강로 용산역과 중대병원 앞 사거리. 8차선 도로에 횡단보도는 보이지 않는다.

한강로 용산역과 중대병원 앞 사거리. 8차선 도로에 횡단보도는 보이지 않는다. ⓒ 이철용


용산지역은 고속철 개통과 함께 주한미군의 이전 등과 맞물려 새롭게 발전하는 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있고 이로 인해 용산구에 건립하는 한 주상복합아파트의 열기는 신청자들로 인해 은행이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경쟁을 벌였고 언론도 연일 보도로 가세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망의 눈길 한 복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특히 사회적 소수자인 장애인, 노인, 임산부, 어린이들에게는 고속철이나 대형 할인마트가 그림의 떡이다.

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분단(?)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

수십 년간 이 지역에서 살아온 이들은 한강로를 중심으로 8차선 도로를 두고 동서로 나뉘어 분단(?)이 된 채 살아가고 있다. 한강대교 남단에서 삼각지 로터리까지 2Km 구간에는 횡단보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단지 낡은 육교 3개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한강로1 ,2, 3동, 서부이촌동, 동부이촌동에 거주하는 노약자들은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가파르고 높은 육교를 위험하게 오르내려야 한다. 8차선 도로를 가로지른 육교는 그 길이도 일반 육교의 배가 넘는다.

a 위험하게 유모차를 들고 육교를 오르는 여성

위험하게 유모차를 들고 육교를 오르는 여성 ⓒ 이철용


그러나 장애인들은 힘들게 오르기도 전에 포기하고 만다. 유모차를 끌고 거리를 나선 젊은 주부들도 이러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이곳에서는 장애인을 비롯한 노약자들은 지척의 지역을 건너기 위해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장애인과 유모차를 가진 주부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반대편 지역에서 볼일을 보기 위해서는 2Km를 돌아야 한다. 장애인과 노약자들은 거의 한 시간 정도 힘든 발걸음으로 반대편 지역에서 일을 보고 다시 그 험난한 귀가길을 맞아야 한다.

지난 3월 24일 용산 지역에 위치한 시민단체인 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프랜드케어,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용산사랑시민연대, 민주노동당 용산지구당 장애인인권위원회가 가칭 ‘한강로 육교 철거를 위한 용산연대’를 결성하고 한강로에 설치된 육교들을 철거하고 횡단보도를 설치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요구는 장애인, 임산부, 노약자들의 보행권이 확보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임신 8개월의 만삭,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시위가 있은 지 두 달쯤 지난 19일, 한강로에 설치된 육교에서는 여전히 힘겹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용산역에서 한강로2가인 집으로 가기 위해 육교 계단을 힘겹게 오르던 국혜현씨, 그는 임신 8개월의 만삭이다. 그는 앞으로도 용산역을 이용해야 하는데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한다. 그는 이 날도 친구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육교를 오르고 있었다.

a 인라인스케이트을 탄 아이들, 어린이들이 위험스럽게 육교를 오르고 있다.

인라인스케이트을 탄 아이들, 어린이들이 위험스럽게 육교를 오르고 있다. ⓒ 이철용


유은숙씨 역시 유모차를 타는 아이가 있는데 이 동네에서 유모차는 꿈같은 이야기라고 했다. “10kg이나 되는 아이를 업고 육교를 건너보세요.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서 말도 못해요. 비라도 내리는 날은 아예 외출할 엄두를 못냅니다”라며 고충을 호소했다. 한강로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김종인씨는 겨울이 되면 육교에서 미끄러져 약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뇌병변장애 1급인 김태현씨는 용산역에서 휠체어를 탄 동행이 있을 때 길을 건너려면 보통 1시간 이상이 걸린다며 “그나마 마음씨 좋은 아저씨나 학생들을 만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 역시도 몸이 불편한 사람이니 업을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집은 친구들이 안 오려고 합니다”라며 원망스런 말을 내뱉는다.

관련 부처, "불편한 거 알지만 계획 없다"

시민들이 이렇듯 불편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부당국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용산구청 사회복지과 담당자는 장애인의 이동 불편은 알고 있지만 횡단보도 설치는 경찰서 권한이라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용산경찰서 교통과 담당자는 8차선의 도로는 자신들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 서울경찰청, 서울시 모두가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답변만 일관하고 있다.

a 주부들도 아이의 손을 잡고 육교를 내러오고 있다.

주부들도 아이의 손을 잡고 육교를 내러오고 있다. ⓒ 이철용


오늘도 한강로의 육교에서는 곡예가 벌어지고 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초등학교 또래의 아이들이 뒤뚱거리며 난간을 잡고 위험스런 장면을 연출한다. 어린 유아들이 학교를 오가기 위해 보폭이 맞지 않는 육교를 힘겹게 오르내린다.

아이를 안거나 유모차에 실은 채 유모차를 들고 육교를 오르는 젊은 주부들을 보며 위험천만한 생각들이 스친다. 노인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육교를 내려와서는 휴 하는 한숨을 내쉰다. 물론 보행에 불편을 겪는 장애인들은 그나마 오르지도 못한다.

서울의 모든 지하철 역사마다 교통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 공사가 마무리 단계다. 그러나 한강로에 설치된 4개의 대안 없는 육교는 교통약자들의 가슴을 누르고 있다. 이곳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그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들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언제까지 8차선 도로를 바라보며 이들이 한숨을 쉬어야 하는가?

a 육교를 오르는 노인들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육교를 오르는 노인들의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 이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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