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과 동고동락했던 '감자꽃'

내게로 다가온 꽃들(56)

등록 2004.05.27 07:24수정 2004.05.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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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싹
감자의 싹김민수

봄과 여름이 혼재해 있는 지금 제주는 한창 보랏빛과 하얀 꽃으로 단장을 하는 감자밭이 있습니다. 꽃을 피운 감자는 땅 속에서 알알이 영글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의 감자는 고마운 구황작물이었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주어서 서민들의 주린 배를 따스하게 해 주었습니다. 감자를 볼 때마다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을 읊조리게 되고, 그 시절 그 짤막한 시에 담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무덤이 있는 감자밭
무덤이 있는 감자밭김민수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감자


이 동시를 개사한 것이라고 해야 옳을까요?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이렇게 덧붙여 노래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꽃 핀 건 조선감자
파 보나마나 조선감자
왜놈꽃 핀 건 왜놈감자
파 보나마나 왜놈감자


자주감자꽃-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는데 요즘은 주로 하얀꽃이랍니다.
자주감자꽃-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는데 요즘은 주로 하얀꽃이랍니다.김민수

어린 시절에는 주로 자주빛 감자꽃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주빛 감자꽃보다는 하얀꽃을 피우는 감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지난해에는 겨우겨우 자주빛 감자꽃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된 연유는 1970년대 이후 대관령과 봉화에서 바이러스에 강한 흰 씨감자가 생산되면서 흰감자가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주감자는 서서히 그 자리를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어떤 분이 육지에서 좋은 씨앗을 구해오셨다고 하면서 나누어주셔서 심었는데 자주감자꽃과 하얀감자꽃이 어우러져 피어 나의 작은 텃밭도 예쁜 감자꽃밭이 되었습니다.


하얀감자꽃
하얀감자꽃김민수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 된 금동(琴童) 김동인(1900-1951)의 '감자'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이후 민중들의 고단한 삶, 그 고단한 식민지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마음 아픈 복녀의 이야기입니다.

남제주군 모슬포 쪽에서는 벌써 감자를 캐기 시작했다고 하니 북제주군에 속하는 이 곳 종달리도 한달여 안에 감자를 캘 것입니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읽었던 금동의 단편소설을 생각하니 곧 감자를 수확할 기쁨보다는 복녀의 아픔이 바로 우리네 모습인 듯하여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김민수

복녀-열다섯 살에 팔십원에 팔려서 이십 년이나 연상의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 때문에 결국은 빈민굴로 굴러 들어가게 됩니다. 배고픔으로 거지 행각을 시작하고 기자묘 솔밭의 송충이 잡는 일을 하러 나갔다가 감독에게 몸을 팔아 일 안하고 품삯을 많이 받는 인부 중의 하나가 됩니다. 원래 가난했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자란 복녀는 이후 세상을 쉽게 사는 방법을 알고는 거지들에게까지도 몸을 팝니다.

어느 날 중국인 왕서방의 밭에서 감자를 훔치다가 발각된 복녀는 왕서방에게 몸을 주고 돈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조차도 묵인해 주며 왕서방의 정부로 전락하게 되고 빈민굴에서는 제법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왕서방이 처녀 마누라를 사오자 질투를 느껴 낫을 들고 신방에 들어갔다가 도리어 왕서방이 휘두른 낫에 죽게 됩니다.

복녀의 시체를 두고 남편, 왕서방, 한의사간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돈 삼십 원에 매수된 남편의 동조로 뇌일혈로 죽었다는 진단으로 공동묘지에 묻힙니다.

하얀감자꽃과 자주감자꽃 사이
하얀감자꽃과 자주감자꽃 사이김민수

먹고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부장적인 체제 속에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들이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사람이 편한 것에 길들여지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 것인지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청소년기에 이 소설을 읽을 즈음에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도 함께 읽었습니다. 어찌 보면 남성들의 무능함과 물질이라는 것이 소박하게나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한 여성의 행복한 삶을 짓밟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웃집과 낮은 담을 경계로 살았던 마을에서는 종종 남성들이 여성을 구타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그 짧은 단편소설들이 뇌리에 깊이 박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민수

무엇이든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고,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인가 봅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을 떠올리면서 일제시대를 생각하게 되었고, 일제시대에 발표되었던 단편소설들을 떠올리게 되니 그 암울한 것들로 인해 감자꽃이 슬프게만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슬픈 것이 아니라 우리 민중들의 아픔과 동고동락했구나 생각하니 고마운 꽃으로 다가옵니다.

자주꽃과 하얀꽃이 어우러진 감자밭-종달리
자주꽃과 하얀꽃이 어우러진 감자밭-종달리김민수

자주감자꽃과 하얀감자꽃이 막 피어나는 감자밭에 서니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은 다스려집니다. 민중들과 동고동락했던 감자에게 고마워지는 순간입니다. 저 감자들이 있기까지 수많은 땀방울들이 있습니다. 절로 들판에 자라는 꽃들도 아름답지만 또한 이렇게 농부의 땀방울이 들어 있는 꽃이기에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김민수

올해 작은 텃밭에서 감자를 캐면 시골생활을 하면서 세 번째로 캐는 감자가 될 것입니다.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해서 늘 다른 감자들에 비해서 작고 못 생긴 감자지만 나에게는 참 소중하고 예쁜 감자입니다. 물질적으로 계산을 하면 그냥 편안하게 사먹는 편이 나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물질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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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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