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박씨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권태로운 삶을 흔든 '보물'

등록 2004.06.12 12:09수정 2004.06.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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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사는 이야기를 쓰면서 사계절하고도 두 계절을 더 보냈습니다. 지지난해 겨울에 시작해서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또 다시 봄과 여름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지 2 년째로 접어들고 있다보니 사는 이야기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구나, 사시사철 골 따라 흐르는 물처럼 똑같이 흘러가는구나 싶었습니다.


모든 것은 분명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냥 그렇게 변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작년에 먹었던 밥을 올해도 먹고 있었고 작년에 피었던 꽃이 올해도 다시 피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작년에도 개울가에서 가재와 놀았고 올해에도 그랬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그럴 것입니다.

분명 모든 것은 변하는데...

a 사랑채 옆 개울물이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랑채 옆 개울물이 해가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 송성영

한 해가 금방 지나갑니다. 눈 내리는 겨울 추위와 군불 지피는 아궁이를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산나물이며 텃밭 얘기입니다. 그러다 보면 한여름 개울가 얘길 했나 싶다가 도토리 주워 묵 해 먹는 가을에서 곧바로 아궁이 불에 밤 구워 먹는 겨울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게 됩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개울에서 가재를 잡아서 어쩌구 했느니 할 것이고 나는 조만간 애호박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늙은 호박을 운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또 눈이 내리고 새싹이 돋게 될 것입니다. 사는 게 다 그게 그거 같았습니다. 일년을 뭉뚱그려놓고 보면 사계절이 나흘 같습니다. 일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 나흘 전날에 일어났던 일 같았습니다.

몸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염을 깍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분명 몇 개월 전에 깍았는데 불과 며칠 전에 깍았던 것 같습니다. 머리카락, 손톱 발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도끼자루 썩어 가는 줄 모르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랬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부질없으니 그 무엇이든 짓지 말라' 했던 옛 성인들 말씀을 이마빡에다가 턱하니 붙여놓고 그야말로 부질없는 도사 흉내를 내고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몸 상태에 아무 이상이 없는데 갑자기 손발이 맞지 않는 운동선수처럼 한동안 글 쓰기조차 귀찮았습니다. 때되면 밥그릇 비우듯 밥벌이 글은 때맞춰 꼬박꼬박 챙겨 써댔지만 정작 가장 쓰고 싶은 <사는 이야기> 글 쓰기가 징그럽게 느껴졌습니다. 일년 전에 썼던 장,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을 다시 반복해서 주절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생각했습니다. 바싹 바싹 메말라 가는 사랑채 옆 개울가에 앉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비워보았습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앉아 흔히 말하는 '명상' 같은 것을 해보았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대해 불만 가득한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려고 숨고르기를 해보았습니다.

모든 것들은 변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안으로 깊숙이 들여다보면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당장 사랑채 옆 개울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개울가 나무들은 여전히 푸르게 우거져 있는데 한 해가 다르게 개울물은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버글거린다는 표현을 써야할 만큼 많았던 가재 녀석들도 줄어들었습니다. 발가락을 간지럽히던 '중태기'라 불리우는 물고기는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다슬기도 줄어들었고 다슬기 유충을 먹고 자란다는 반딧불이는 거의 사라지다 시피 했습니다. 어쩌다 한 두 마리 외롭게 밤하늘을 유영하곤 합니다.

내 몸 역시 예전 그대로가 아닙니다. 이제 40대 중반인데 수염은 점점 희어져 가고 있었고 입안에서는 풍치가 하나둘씩 들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사랑니와 사랑니에 밀린 어금니를 뽑아냈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오래 동안 밥벌이 원고를 쓰고 나니 잇몸이 붓고 피가 나기도 했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글자들이 침침하게 다가왔습니다. 허전하게 비어있는 입안 저만치 구석을 혓바닥 끝으로 쓸어내면서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갈수록 지구는 점차 병들어가고 있듯이 내 머리 속은 다양한 지식들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지만 몸은 점차 쇠약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a 고양이 밥그릇이 놓여져 있는 처마 밑에서 박씨가 새싹을 피워올렸습니다.

고양이 밥그릇이 놓여져 있는 처마 밑에서 박씨가 새싹을 피워올렸습니다. ⓒ 송성영

오늘도 여전히 아침, 점심 꼬박꼬박 챙겨먹고 부엌에서 나오다가 부엌 앞 창고 처마 밑에 외롭게 피어오른 새싹을 보았습니다. 박 이었습니다. 고양이 밥그릇 옆에 박이 피어올랐던 것입니다. 큰 아이 인효가 심었는지 작은 아이 인상이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에 누군가가 박씨 하나를 심었던 것입니다.

햇볕이 들지 않고 이슬도 맺히지 않고 언제나 처마 그늘에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통하리 만큼 생명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단지 흙만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이들이 종종 물을 주고 있었는지 아주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헌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박씨가 피워 올린 생명 속에는 단지 흙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빛과 바람이 있었습니다. 박씨를 심은 아이들의 마음까지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한참을 쪼그려 앉아 보다가 문득, 내 주변은 온통 이 새싹과 같은 생명덩어리들로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주변은 온통 그런 변화무쌍한 신비로운 생명체로 그득했습니다. 그렇게 처마 밑에 피어오른 새싹이 내 안에 갇혀 있던 나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부질없음'을 읊조리고 있는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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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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