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게 비지떡이라고요?"

속 빈 강정 보다는 훨씬 낫지요

등록 2004.06.23 12:34수정 2004.06.2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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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대전 시내 옛 도심 지역에 디지털 도서관이란 게 문을 열었다. 어찌 어찌 하다보니 이 도서관의 단골이 되었다. 우선 여기 가면 17인치 LCD 모니터와 나의 시력, 그리고 점점이 박힌 매입등, 이 삼박자가 마치 육친처럼 친숙하게 조응하는 작업 환경이 내겐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것이다.


이곳에선 <삼국사기>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특수 자료 뿐 아니라 국회도서관 자료 검색 전용 코너도 있고,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나오는 각종 문화재 관련 VCD를 볼 수 있으며 전통음악 CD도 들을 수 있다. 게다가 각종 영상 자료를 섭렵할 수 있도록 DVD를 감상할 수 있는 대형 35인치 멀티비전도 설치돼 있다.

언젠가 한 번은 그 대형 멀티비전이 자신이야말로 이 디지털 도서관의 '몸짱'이라며 살살 눈웃음을 치는 바람에 넘어가서 내 생물학적 나이마저 까마득하게 망각한 채 <10일 안에 남자 친구에게 채이는 법> 같은 영화를 감상하는 '정서적인 노망'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여간 이런 이유 저런 핑계로 사진 작업을 할 때마다 이 도서관을 애용하게 되고 그때마다 속으로 외치는 거다.“그래, 디지털 도서관! 넌 날 위해 태어났어.”

그러나 이 도서관에도 약간의 흠결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식당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 한다해도 먹는 것만은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닌가. 따지고 보면 약간의 흠이 아니라 결정적인 흠인 셈이다. 그러나 걱정 붙들어 매시라!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문제는 선택이다. 어디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다행히 도서관 근처에는 거미줄처럼 가로 세로로 늘어선 식당들이 사람들이 걸려들길 기다리고 있다. 오라! 그대들, 밥벌레들이여!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통신 왕국에 살다보니 위장도 어느새 핸드폰으로 변해 버렸는가. 쪼르르 쪼르르…. 뱃속에서 핸드폰 신호음이 들린다. 점심 시간입니다. 당신의 위장은 독과점을 막기 위해서 016, 018, 019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점을 찾아 도서관 근방을 서성거린다. 어린 시절 에드먼드 데 아미치스가 쓴 <엄마 찾아 삼만리>는 얼마나 눈물겨웠던가. 난 언젠가 그 동화를 능가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 <식당 찾아 삼만리>를 꼭 완성하고야 말 것이다!

칼국수 집에서 내건  현수막
칼국수 집에서 내건 현수막안병기

그런데 작년 겨울 이 거리에 수상한 현수막 하나가 걸렸다.

“칼국수 1500원”


이곳은 얼마 전 대전시청이 신시가지로 이전해 가기까지 대전시청과 중구청, 경찰서뿐만 아니라 각종 사무실이 즐비했던 번화가였다. 그래서 대전에서도 음식값 비싸기로 정평 난 곳이다. 그런데 이 거리에 언감생심 1500원짜리 칼국수가 납시다니! 아무리 불경기로서니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노는 물이 달라"라고 중얼거리며 이 싸구려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그것도 군대에서 배운 '정숙보행'을 응용해서. 그런데 힐끔 이 집 간판을 쳐다 본 순간 내 결심은 봄날 연줄 끊어진 연 날아가듯 사라지고 말았다.

"해망동 칼국수" 해망동이라면 내가 젊은 날 푸른 꿈 대신 싹수가 누런 빛깔의 막걸리를 마시며 살았던 군산 도선장 옆 동네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해망동"이란 낱말이 내 잠자던 그리움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문을 받으러 온 사람은 30대 초반의 건장한 사내였다.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러고 나서 난 왜 이 집 간판에 '해망동'이란 말이 들어갔는지를 은근슬쩍 물어보는데, 사내 왈 수라간에서 일하시는 자신의 어머니 최정자(61)씨의 고향이 군산이라는 게 아닌가.

이윽고 양푼 크기 만한 사기 그릇에 담긴 칼국수가 나왔다. 깍두기 한 접시와 대접에 넘쳐날 정도의 김치도 함께. 워따메, 이 집에서 칼국수 먹다 죽은 사람 있어 염라대왕한테 영업정지 당한 적 있디야? 양이사 많다마는 맛이 별 거 있을라고?

난 칼국수를 한 가락 두 가락 사레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먹어 나갔다. 그런데 맛이 제법 괜찮았다. 면발도 손으로 직접 밀어 만든 손칼국수였으며 국물 맛도 그만이었다. 내가 대전에 이사와서 먹어 본 칼국수 중에 가장 나았다고 할만큼.

칼국수집  실내 풍경
칼국수집 실내 풍경안병기

食(식)은 되었거니와 이젠 구경이라 천지사방을 살펴보니 실내장식마저 꽤나 고풍스러웠다.수라간 옆에 골동품 따위가 놓여 있고 벽은 벽지 대신 누군가 수채화풍으로 그린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싸고도 맛있고 약간은 고풍스럽기까지 한 이 집에 손님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후로도 몇 번 들렸지만 손님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싼 게 비지떡"이란 말마따나 그래서 손님이 들지 않는걸까.

하여간 내 좁은 머리로 이리 뒤집고 저리 훑어봐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난 이렇게 밖에 결론 지을 수밖에 없었다. 행여 이 집의 잘못이 있다면 싸다는 것에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혹 이 거리에 있는 넥타이를 맨 근엄한 분네들은 이 음식점에서 칼국수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을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식과 부는 이런 하찮은 음식 하나에까지 허위의식을 부려놓고 있는 건 아닐까. 만일 이 칼국수 집이 시장이나 역전 근처에 있다면 아마도 손님들로 넘쳐나리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푼짜리 허위의식으로 무장하고 생을 꾸려나간다면 가난하고 못 배운 무지랭이들은 생존본능 하나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법이다.

잔치국수집. 간판도 없고 문도 비닐이다.
잔치국수집. 간판도 없고 문도 비닐이다.안병기
대전역 근처에 가면 비닐로 된 출입문을 단 <잔치국수>라고 써 붙인 집이 있다. 이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대접에 훌렁훌렁 잔치국수를 담아 달랑 깍두기 하나 갖다주고 단돈 1000원을 받는다. 모두들 막걸리 마시듯 국수를 후루룩 마시고 자리를 탈탈 털고 일어난다. 벌써 등 뒤에는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겐 허위의식이 없다. 부딪쳐서 내가 깨지든가, 상대가 깨지든가 할뿐이다. 배움은 은연 중 마음을 감추는 기술도 가르치는 것인가. 밥이란 본질적으로 치욕의 산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끈질기게 섬겨야만 하는 몸이란 본능을 위하여 이 치욕을 견뎌낸다, 요즘 사람들은 본능을 너무 섬긴다. 보다 더 좋은 걸 먹으려고 보다 큰 치욕을 감수하면서 투덜거린다. 아, 쓰발! 세상살기가 왜 이리 힘드다냐!

그나저나 오늘 낮엔 무엇을 먹는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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