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호의 마음을 돌린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학창시절 방황하던 두 녀석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등록 2004.06.25 23:56수정 2004.06.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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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 두 명의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한 아이는 멀리 천안에서 학교로 직접 발걸음을 하였고, 다른 아이는 오랜만에 메일을 띄워 저를 찾았습니다.

이 두 제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부모와의 불화로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행히도 두 아이 모두 전에 비해 부모와의 사이가 사뭇 좋아진 듯 하였습니다.

교사로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자들이 가정불화로 인해 방황하거나, 끝내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과 학교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온전하지는 못해도 세상의 거친 물살을 건너는 아이들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고자 했던 것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을 때의 안타까움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니 한 때 방황하던 아이들이 무사히 학교를 마치고 요즘 같은 불황에도 탄탄한 직장까지 얻어 손에 무언가를 들고 과거의 담임이랍시고 찾아와 주면 교사로서 더 큰 기쁨과 보람이 없지요. 게다가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달라진 부모님 얘기를 꺼내며 마냥 좋아하는 표정을 지을 때는 그 기쁨이 더 클 수밖에요.

종호는 입학식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열흘이 넘어서야 사복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나 자퇴원서를 쓰겠다고 한 아이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등진 뒤 관광버스 기사인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상 집을 자주 비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도 없는 집보다는 거리가 더 다정한 공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노는 맛에 길들여져 학교 생활을 견디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그 날 우리는 학교 뒷산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럼 다시 거리로 돌아갈래?"
"예?"
"둘 중 하나잖아. 학교 아니면 거리."
"……."
"선생님은 네가 학교를 선택하길 바래. 먼 훗날 네 모습을 생각해 봐. 선생님이 도와줄게."
"고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선생님께 폐만 끼칠 것 같고요.."
"선생님은 폐를 끼치라고 있는 사람이야. 중요한 건 너야."
"……!"


다음날도 우리는 학교 뒷산을 찾았습니다. 그 날은 그와 약속한 마지막날이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더라도 3일 동안만 학교에 나와 저는 만나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동산 벤치에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저는 그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제가 눈을 감는 시늉을 하자 따라서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후 고요가 찾아왔고, 그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다가 제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눈을 감으니까 아무 것도 안 보이지?"
"…예."
"네가 없으면 세상도 없는 거야. 다시 눈을 떠봐. 세상이 다시 생겼지?"
"예? 예."
"네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없어지고 눈을 뜨면 다시 생기고. 너 참 대단하다!"
"아이, 그건 누구나 다 그렇잖아요."
"누구나 다? 그래 누구나 다 그렇지. 사람은 누구나 다 대단한 거야."
"전 대단하지 않은 걸요."

"네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없어지는데도? 눈을 뜨면 다시 생기고."
"아이 참. 그런 게 아니잖아요."

조금은 짜증이 나는지 조금 언성이 높아진 아이에게 저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한테도 아들이 있어. 어떤 사람이 천 억을 준다고 아들을 달라고 하면 내가 줄까? 아니,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하면 내 아들을 줄까? 네 생각은 어때?"
"안 주지요."
"그럼 너의 아빠는?"
"…아빠도요."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야. 이 세상 천하만물하고도 바꾸지 않을 만큼."

그는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말고 눈을 허공에 둔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 날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이렇게 다시 이어졌습니다.

"종호야, 내가 보기에 넌 좋은 아이야."
"아닌데요."
"넌 학교에 다닐 의사도 없으면서 선생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삼일 동안이나 학교에 나왔잖아. 내가 아는 학생들 중에서 너만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내일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더라도 약속을 지켜준 것은 고맙게 생각할 거야."

"고마운 것은 저지요. 제가 뭔데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고…."
종호는 속울음을 삼키는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이렇게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 선생님… 저도 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선생님께 실망을 드릴까봐… 저에게 너무 기대를 걸지는 마세요."

그 날 결국 종호는 학교를 다니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3년 동안 단 한 번의 사고나 결석도 없이 학교 생활을 성실히 잘 마쳤습니다.

저는 가끔 종호에 대하여 엉뚱한 상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마치 필름을 되감기라도 하듯 동산에서 만났던 그 날로 되돌아가 이런 대화의 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선생님한테도 아들이 있어. 어떤 사람이 천억을 준다고 아들을 달라고 하면 내가 줄까? 아니,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하면 내 아들을 줄까? 네 생각은 어때?"
"안 주지요."
"그럼 너의 아빠는?"
"아빤 저보다는 천 억을 택할 걸요."

만약 그 날 이런 대답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결국 종호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저의 어쭙잖은 화술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종호가 학교로 찾아온 그 다음날 보람이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여러 차례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사과의 말부터 적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다보면 일상의 작은 약속쯤은 쉽게 어기는 나쁜 습성이 자기도 몰래 자리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크게 나무란 적이 있는데 고맙게도 그때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보람이는 편지 말미에 '죄를 만회할 생각으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제가 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놓았다고 했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긴 글 중에 이런 글 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래 전 제가 한참 방황을 하던 때 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는 언제나 여느 때처럼 힘들다며 선생님께 말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 울먹이면서 "너는 왜 모든 짐을 너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하니?" 라며 가슴에 맺힌 말을 내뱉는 것처럼 하셨어요. 저에게 그 말은 너무도 큰 힘이 되었고 저는 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되었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 더 감사 드릴 일이 하나 더 생겼다면 믿으시겠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저는 또 술 주정을 하시려나 했더니 갑자기 울먹이시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랑한다"는 수줍은 아버지의 고백도 받게 되었어요.

선생님의 책을 읽어보신 모양이에요. 지금은 정말이지 저에게 최고의 아버지가 되시려고 최선을 다하고 계신답니다. 그런 아버지를 요즘 볼 때면 입가의 미소가 스며들어서 아주 많이 뿌듯하답니다.


'사랑한다는 수줍은 아버지의 고백도 받게 되었어요.'
'지금은 정말이지 저에게 최고의 아버지가 되시려고 최선을 다하고 계신답니다.'

저는 이 대목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너무 기쁘고 흥분된 나머지 제 입에서는 "이제 됐다. 이제 됐다" 라는 말이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자꾸만 터져 나왔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교사의 사랑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 온전한 사랑이 오래갈 수 있기를, 오래 오래 보람이의 가슴에, 온 몸에 넘쳐흐르기를 간절히 빌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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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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