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못낸다꼬 모든 기 끝나는 기 아이다"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71> 공장일기<41>

등록 2004.07.01 13:04수정 2004.07.0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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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영주가 잠수로 했다꼬?"
"보나마나 <마산문화> 4집 때문이것지 뭐. 그라이 니도 우쨌거나 몸조심 잘 해라이. 지금 절마(보안대 근무자)들이 영주로 잡을라꼬 눈이 벌겋게 설친다 카더라."
"하긴 절마들도 요새 똥줄이 바싹바싹 탈끼거마는. 인자 학생들 뿐만 아이라 노동자들까지 온 천지에서 데모를 하고 있은께네 저거들도 미쳐 날뛸 수밖에 없것지."


그랬다. 그동안 일부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에 대한 시위의 불꽃이 1985년부터 서서히 남성 노동자들에게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그것도 중소기업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었던 1970년대 말과는 달리 이제는 대기업체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들이 '임투, 근로조건 개선, 노동해방'이라는 깃발을 내세우고 파업의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해는 대우자동차에서 파업이 일어난 데 이어 구로 지역에서도 노동자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게다가 내가 일하는 공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성산패총 근처에 있는 통일산업에서도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다. 특히 통일산업 현장노동자들의 파업은 창원공단에서는 처음으로 터진 노동자들의 억눌린 함성이었다.

a 사향문학동인들, 앞줄 왼쪽으로부터 박영주, 김명희, 뒷줄 왼쪽으로부터 우무석, 나, 유영국

사향문학동인들, 앞줄 왼쪽으로부터 박영주, 김명희, 뒷줄 왼쪽으로부터 우무석, 나, 유영국 ⓒ 이종찬

그 당시 창원공단 통일산업 파업과정을 상세하게 실은 <마산문화> 4집 <희망과 힘>의 편집과 책임은 박영주가 맡고 있었다. 박영주는 1978년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나와 함께 <사향문학동인> 활동을 같이 했었고, <마산문화>에서도 같이 활동하고 있는, 나와는 아주 가까운 글벗이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지이기도 했다.

근데, 그 영주가 <마산문화> 4집을 낸 뒤 제대로 배포도 하기도 전에 어디론가 잠수를 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안대에서는 이미 박영주를 창원공단 현장노동자들에게 노조 결성과 파업을 부추기는 배후 주동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또한 영주는 실제로 통일산업 노조위원장 문00씨와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다.

"인자 <마산문화>도 이대로 끝이 나는갑다."
"그라모 우리는 인자 우째되는 깁니꺼? 이대로 해산하는 깁니꺼?"
"머슨 소리 하노? 책을 못낸다꼬 해서 모든 기 그렇게 끝나는기 아이다. 지금이야말로 철저하게 민중의 바다로 더 깊숙히 파고들어야 하는 때인기라."


그때부터 <마산문화>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부정기적으로 1년에 한 권씩 나오던 <마산문화>는 제4호 <희망과 힘>을 끝으로 저절로 폐간되고 말았다. 이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박영주 또한 긴 잠수의 나날을 여기저기서 힘겹게 보내다가 결국 저들이 처놓은 덫에 걸려 한동안 옥고를 치렀다고 했다.


<마산문화>는 비록 저들의 철저한 공작에 의해 그렇게 꼬리를 감추고 말았지만 아예 그 뿌리까지 모조리 뽑힌 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마산문화>는 폐간이나 일시 중단이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지만 창원공단 곳곳에 '노동해방'이라는 깃발을 내세운 탄탄한 민주노조를 만드는 징검다리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우리도 노조를 맨들어야 안 되것나?"
"공장이 다른 데로 넘어갈 판인데 노조는 머슨 노조!"
"하긴 오죽했으모 회사 이름을 '산다'라고 지었겠노."



그랬다. 창원공단 곳곳에서 민주노조가 만들어지고 있을 때에도 내가 다니는 공장에서는 아예 노조를 만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우리 공장에서 생산하던 제품은 이미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공장 간부들은 죽어가는 공장을 되살리기 위해서 새로운 제품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가 그 바쁜 조립부에서 사출실로 부서 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새로운 제품 개발 때문이었다. 특히 그 새로운 제품의 중요한 부속품은 대부분 사출실에서 생산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 때문에 나는 8년 동안의 공장 생활 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긴 오죽했으면 공장 이름을 '죽지 않고 산다' 혹은 '많이 낳는다' 라는 뜻에서 '산다'(産多) 라고 지었겠는가. 그랬으니 내가 다니는 공장의 현장 노동자들은 노조보다 우선 공장이 새로운 제품 개발로 인해 힘겹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어느 대기업에 합병될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실 나 또한 몹시 불안했다. 사출실에서 일하는 것은 우선 몸이 편해 아주 좋았지만 자칫하여 새로운 제품 개발에 실패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났다. 왜냐하면 새로운 제품 개발의 실패는 곧 다른 회사와의 합병을 뜻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소속된 프로젝트 팀의 운명도 그대로 끝이 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회사와 합병이 된다면 그들의 정리 대상 1호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바로 새로운 제품 개발을 책임지고 있었던 프로젝트 팀이 아니겠는가. 그래.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몇 개월 남지 않은 병역 특례가 끝나자마자 8년 동안 몸 담았던 공장에서 쫓겨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열심히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러 잡지에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0년, 시인 이승철씨가 대표를 맡고 있었던 황토출판사에서 나온 나의 첫 시집 <노동의 불꽃으로>에 실린 60여 편의 노동시들도 그때 거의 다 쓴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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