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엔 수제비 만들어 보세요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72> 밀떡국

등록 2004.07.05 13:58수정 2004.07.0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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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가 직접 끓인 수제비

내가 직접 끓인 수제비 ⓒ 이종찬


"아빠! 배고파."
"그러게 아까 깨울 때 일어나 아침을 먹었어야지. 점심 때까지 늦잠을 자는 녀석들이 어디 있어."
"근데 뭘 먹을 거야?"
"몰라. 생각 좀 해보고."
"그럼 우선 토마토부터 하나 갈아줘."
"아빠 나도."



매주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점심 때까지 늦잠을 자는 큰딸 푸름이와 작은딸 빛나가 정오쯤 부스스 눈을 뜨더니 갑자기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집 밖에는 태풍 '민들레'의 영향으로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고 있었다.

"아빠! 대낮인데도 왜 이리 캄캄해? 아직도 태풍이 불고 있어?"
"아니, '민들레'가 올라오다가 제주 바다에서 그만 빠져죽고 말았대."
"근데도 왜 이리 바람이 심하게 불어?"
"민들레 홀씨라도 날리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날 나는 배가 고프다고 마구 보채는 두 딸에게 우선 토마토를 갈아주었다. 그리고 파를 뽑기 위해 잠시 집밖으로 나왔다. 금세 우산이 뒤집혔다. 집 근처 텃밭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던 옥수숫대들도 모두 허연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이리저리 마구 뒤엉켜 있었다.

풋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린 고춧대들과 호박넝쿨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지난 해 가을, 태풍 '매미'가 왔을 때에는 평소 장모님께서 애지중지 가꾸던 이 텃밭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 집 화장실 창문마저 모두 깨어져 큰 곤욕을 치르지 않았던가.

a 맛있는 국물을 내기 위해서는 멸치, 양파, 대파, 땡초, 다시마, 무, 새우 등을 넣고 40분 가량 푸욱 끓이는 것이 좋다

맛있는 국물을 내기 위해서는 멸치, 양파, 대파, 땡초, 다시마, 무, 새우 등을 넣고 40분 가량 푸욱 끓이는 것이 좋다 ⓒ 이종찬


a 밀가루 반죽을 할 때에는 계란과 소금물을 약간 넣고 오래 버무려야 쫄깃하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에는 계란과 소금물을 약간 넣고 오래 버무려야 쫄깃하다 ⓒ 이종찬


근데 무얼 해 먹지? 국수? 아니, 국수는 얼마 전에도 해 먹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수제비? 그래. 내가 어릴 적에도 어머니께서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수제비를 끓여주셨다. 멸치를 푹 우려낸 국물에 동동 떠다니는 그 수제비는 정말 구수하고 맛이 좋았다.

그래. 그때 우리 마을사람들은 모두 수제비를 '밀떡국'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늘처럼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면 마을 전체가 밀떡국을 끓이기 위해 멸치 국물 우려내는 구수한 내음으로 가득 찼다. 그래. 그런 날은 부엌 쪽만 바라보아도 절로 배가 불렀다. 왜냐하면 비가 오는 날에는 어머니께서 밀떡국만 끓이는 것이 아니라 맛난 정구지전(부추전)까지 부쳤으니까.


"아빠! 내 뱃속에는 거지가 우글거리나 봐."
"조금 기다려."
"어! 근데 그게 뭐야? 아싸! 수제비다!"
"아싸! 아싸!"

"수제비가 그렇게 먹고 싶었어?"
"응. 근데 왜 갑자기 수제비를 만들 생각이 났어?"
"으응. 비가 오니까. 아빠가 어릴 적에 너희 할머니께서는 비가 오는 날마다 수제비를 끓여주셨거든."
"그럼, 우리도 비가 오는 날마다 수제비를 끓여 먹자."



푸름이와 빛나는 어릴 적부터 수제비를 참 잘 먹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두 딸은 내게 수제비를 끓여달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아빠가 끓인 수제비라고 하면서. 하지만 그때 나는 '비도 오지 않는데 무슨 수제비?' 하면서 두 딸의 간절한 부탁을 대충 얼버무려 버렸다. 어릴 적 내 어머니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a 밀가루 반죽이 끝나면 30분 정도 숙성시킨다

밀가루 반죽이 끝나면 30분 정도 숙성시킨다 ⓒ 이종찬


a 수제비에 들어갈 재료는 호박, 감자, 양파, 파, 마늘 등을 넣는 것이 좋다

수제비에 들어갈 재료는 호박, 감자, 양파, 파, 마늘 등을 넣는 것이 좋다 ⓒ 이종찬


어머니께서는 수제비를 참 맛있게 잘 끓이셨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수제비를 맛있게 끓이려면 우선 밀가루 반죽을 잘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수제비를 던져 넣을 국물을 잘 우려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국물을 내기 위한 재료를 먼저 준비하여 불 위에 올려놓은 뒤 밀가루 반죽을 하면 시간이 꼭 맞는다고 하시면서.

그날, 나는 어릴 적 내 어머니께서 수제비를 만들던 기억을 최대한 되살렸다. 나는 제일 먼저 냄비에 적당량의 물을 부은 뒤 굵은 멸치와 무 한 토막, 뿌리 달린 대파, 땡초, 양파, 다시마, 새우 약간을 넣고 가스 불을 켰다. 그리고 밀가루에 날계란 두어 개와 소금물을 약간 부은 뒤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밀가루 반죽은 많이 비빌수록 좋은 기라. 그래야 수제비가 부드럽고 맛이 쫄깃쫄깃하게 되거든."
"그라모 밀가루 반죽을 다신 물이 다 끓을 때까지 계속 비비고 있어야 되나?"
"그기 아이라 밀가루 반죽을 적당히 비비고 나서 30분 정도 가만이 놔두모 지질로(저절로) 숙성이 된다카이."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밀가루 반죽을 다 한 나는 밀가루 반죽을 그릇에 담아 랩을 씌운 뒤 냉장고에 넣었다. 이어 도마와 부엌칼을 꺼내 감자와 호박을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양파와 파, 마늘은 잘게 다졌다. 그리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국물이 펄펄 끓고 있는 냄비에서 건더기를 모두 건져냈다.

그렇게 하고 나자 시간이 대략 40분 정도가 지났다. 어머니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나는 우선 끓고 있는 국물에 감자를 넣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밀가루 반죽을 꺼내 손에 물을 적셔 납작납작하게 펴가면서 냄비 속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내 어머니께서 하신 것처럼 그렇게 재빨리 떼 넣지는 못했다.

a 잘 우려나고 있는 수제비 국물

잘 우려나고 있는 수제비 국물 ⓒ 이종찬


a 잘 우려난 수제비 국물은 건더기를 모두 건져내야 한다

잘 우려난 수제비 국물은 건더기를 모두 건져내야 한다 ⓒ 이종찬


그렇게 밀가루 반죽을 다 떼 넣은 나는 호박과 양파, 파, 마늘을 집어넣고 간을 보았다. 조금 싱거웠다. 그때 나는 장모님께서 주신 집 간장을 넣을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 수제비간을 맞출 때 간장을 넣으면 색깔이 거뭇하게 변하기 때문에 반드시 소금을 써야 한다고 하신 그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아~ 수제비 대령이오."
"아빠! 기왕 끓이는 김에 조금 더 많이 끓이지."
"이것도 엄청나게 양이 많아. 아빠는 남길까 봐 더 걱정인 걸."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나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어."
"푸름아! 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
"돈 내기 하고 먹는 내기 하는 사람."


그날 내가 끓인 수제비는 내가 먹어보아도 참으로 맛이 있었다. 물론 내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그 수제비의 맛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푸름이와 빛나 또한 참으로 오랜만에 아빠가 끓여준 수제비라서 그런지 서로 흘겨가며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용을 썼다. 내가 미처 반 그릇을 비우기도 전에 더 달라고 했다.

그래. 요즈음처럼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이런 날에는 집에서 직접 수제비를 끓여 가족들과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보자. 그리하면 김이 무럭무럭 나는 냄비 속에는 맛있는 수제비만 동동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늘 가난하고 배가 고팠던 어릴 적 맛있는 추억도 함께 동동 떠다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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