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가 낄 때까지 만들고 또 가꾸는 민족

주마간산 일본 큐슈여행기(1)

등록 2004.07.05 18:15수정 2004.07.06 14:35
0
원고료로 응원
a 쿠마모토 국제공항 출구

쿠마모토 국제공항 출구 ⓒ 김정은

일본 쿠마모토행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했다. 1시간 10분이라는 가까운 거리, 시간대까지도 똑같아 시계를 맞출 필요가 없는 나라가 일본이다.

꼼꼼함과 답답함


한마디로 해외여행 가는 기분이 별로 안 들지만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 여기가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사실을 입국 심사에서 실감하게 한다.

‘와, 그네들의 답답하기까지 한 꼼꼼함이란….’ 체류기간에 3이라고 숫자만 썼더니 3일이냐 3주냐 하고 묻는다. 3일이라고 했더니 3자 옆에 날일(日)자를 써 넣으란다. ‘보통 입국 심사서에 있는 체류기간은 각국 공히 일 단위로 쓰는 게 정석 아닌가? 당연히 3일이라고 알아야 할 텐데….’ 직접 물어 확인해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굳이 날일(日)자를 다시 기입하라고 하니 마치 내가 체크리스트 상에 있는 범죄자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뿐인가? 입국심사장 아줌마는 비닐로 된 여권 커버를 벗기고 스테이플로 뭔가를 붙여놓는다. 처음에는 비자 면제국이 아니라 입국심사가 꽤 까다롭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무슨 대단한 것을 붙여놓았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스테이플로 꼼꼼히 붙여놓은 것은 출국심사서 여행객이 잊어버릴까봐 여권을 단단히 박아둔 것이었다.

정말 그 꼼꼼함에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융통성 없는 맹목적인 꼼꼼함.

내게 처음 다가 온 일본은 이런 느낌이었다.


a 쿠마모토 공항 밖의 풍경

쿠마모토 공항 밖의 풍경 ⓒ 김정은

출구를 나온 구마모토 국제공항은 출구(GATE)가 한 군데라 간이 공항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이곳에 오는 비행기가 한국의 A 항공사 비행기밖에 없다고 해도 명색이 국제공항인데 이렇게 협소할 수가 있나. 바로 옆에 있는 국내선 전용공항은 이와 대비되게 넓고 깨끗하다. 그 이유를 이곳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만약 이곳에 취항하는 단 하나의 항공사가 한국이 아닌 미국 항공사라도 이 꼴일까? 만약 이 질문에 “정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난 일본인들을 정말 실용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입국 심사에 불편함만 없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한국 항공사이고, 주로 한국인이나 중국인이 타고 오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굳이 이 공항에 전용선 취항을 해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입문서로 정평이 나있는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가 나름대로 명쾌하게 분석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받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한번도 일본 땅을 밟지 않은 상태에서 서양인의 단견으로 복잡한 일본의 민족성을 과감하게 교통 정리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 또한 대단한 사람이다.

일본인 스스로도 혼네(本音)니, 다테마에(建前)니 하며 헷갈리며 살아가는데 일본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명쾌하게 구획정리를 했을까? 아마 가보지 않았기에 비교적 객관적인 눈으로 용감하게 분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공항을 나와 기쿠치 계곡으로 출발했다.


자동차 차창 밖으로 낯익은 시골풍경이 스쳐지나간다. 도로 양 옆에는 대단위 옥수수밭 행렬이 펼쳐져 약간 이국적으로 보일 뿐, 우리네 농촌 풍경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흙만은 우리네 흙과 달리 비옥해 보이는 검은 색깔의 흙이었다. 흙색깔이 검은 이유가 이곳이 화산지대라서 화산재의 영향 탓인지 아니면 퇴비를 많이 주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아마 한국인인 나 또한 우리네의 붉은 황토 흙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아무 꾸밈없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황토 흙냄새.

만약 이곳 검은 흙의 옥수수밭에 습습한 남국의 바람이 불면 어떤 느낌일까?

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마다 노래가 되는 때가 있다.
이 세상 많은 시인들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칼을 흔드는 시를 만나는 때가 있다.
뜨겁게 흐르는 것들이 서늘히 이마를 씻어주는 시들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 달씩 두 달씩 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상의 많은 시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고 더 바쁘게 읽고 쓰곤 하였지만
시를 만나는 날이 멀어지는 때가 있다.
조금은 풀죽은 모습으로 웃어넘기곤 하였지만
시를 버리고라도 더 중요한 것을 찾아
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무슨 다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제 가슴의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먼저 시를 버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가 먼저 우리를 배반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종환>/눈에 보이는 것마다 시가 되는 때가 있다


생생한 이끼의 의미- 자연은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어느덧 이정표는 왼쪽으로 기쿠치(菊地) 계곡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a 기쿠치계곡 입구에 세워진 안내 푯말

기쿠치계곡 입구에 세워진 안내 푯말 ⓒ 김정은

‘구마모토 현’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기쿠치 계곡은 ‘기쿠치 강’ 원류 근처에 있는 4km에 걸쳐 이어진 계곡이다. '아소가이린 산'에서 넘쳐나는 복류수를 근원으로, 한여름에도 섭씨13도 전후의 차가운 물이 흐르고 있다.

a 계곡 입구의 수중보

계곡 입구의 수중보 ⓒ 김정은

'국화의 땅'이라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이곳은 일본 사람이 몇 십 년동안 공을 들여 오염된 자연을 회복시키고 가꾼 자연 휴양림으로써 계곡물을 직접 떠먹어도 괜찮을 만큼 청정 수질로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끈질기게 자연을 가꾸어 나간 인내심의 결과물을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다.

a 하늘을 찌를듯이 울창하게 서있는 삼나무 군락

하늘을 찌를듯이 울창하게 서있는 삼나무 군락 ⓒ 김정은

이 숲과 계곡의 건강함은 이미 계곡 입구부터 죽죽 뻗어있는 삼나무와 이곳저곳 붙어있는 파릇파릇 성한 이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윤이 반잘 반질 흐르는 생생한 이끼를 보기가 힘들어졌는데, 이곳에서는 너무나 쉽고 생생하게 어디에서나 이끼를 만날 수 있어 부러웠다. 그만큼 우리 땅도 이끼가 살지 못할 만큼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얘기 아닌가?

a 기쿠치계곡에 어느곳에나 볼 수 있는 윤이 반질반질 흐르는  이끼들. 숲의 건강함을 알 수 있다.

기쿠치계곡에 어느곳에나 볼 수 있는 윤이 반질반질 흐르는 이끼들. 숲의 건강함을 알 수 있다. ⓒ 김정은

이끼를 보니 문득 우리가 그리도 싫어하는 이 사람들의 국가, 기미가요의 한구절이 생각난다.

"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거기에 이끼가 낄 때까지 영원히 이어지리."

마치 애국가에서 영원을 강조하는 동해물과 백두산의 의미만큼 이끼는 일본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영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끼라 하더라도 그 정성들이 모여져 지금의 일본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a 가케마쿠 폭포

가케마쿠 폭포 ⓒ 김정은

울창한 나무 숲 속을 걸어가자면 '가케마쿠 폭포'를 비롯해 '레이메이 폭포', '모미지가세', '류가부치', '덴구 폭포', '욘주삼만(四十四萬)폭포' 등 청류가 만들어 내는 폭포와 심연, 거암 등의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a 기구치계곡의 맑은 계곡물 , 맑고 깨끗한 자연은 결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기구치계곡의 맑은 계곡물 , 맑고 깨끗한 자연은 결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 김정은

맑고 깨끗한 자연은 결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인내심으로 가꾸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새기며 다음 목적지인 아소산으로 출발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5. 5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계엄은 정말 망상일까? 아무도 몰랐던 '청와대 보고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