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패스트 푸드점에 한 남녀가 앉아 있다. 남자 이름은 수봉이고 여자이름은 현지다. 여자가 고개를 숙이며 쭈뼛대다가 "너, 해리 아직두 많이 좋아해?"라고 남자에게 묻는다. 남자는 "당연하다"고 대답한다.
그래도 여자는 다시 용기를 내서 "해리가 너한테 못 되게 굴어두? 해리가 너 안 좋아해두? 사실, 해리 땜에 말은 못했는데, 나 너 좋아해. 첨 널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남자는 "야, 너 솔직히 말해봐. 해리가 시킨 거지? 내가 어떻게 나오나 시험해 볼라구? 야, 무섭다. 요즘 내가 해리한테 시큰둥했더니 금세 확인 들어오네. 그치만 그렇게 넘어갈 봉이 아니쥐!"라며 얼렁뚱땅 분위기를 모면하고 빠져 나간다.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표정에는 여자의 감정을 일찌감치 눈치챈 듯 여자에게 미안해 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이 남녀의 대화 내용만 놓고 보면 심각한 남녀간의 삼각관계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 6월 3일 첫선을 보인 EBS 일일연속극 <깡순이>(안금림·김연신 극본, 이상범 연출, 월~금 저녁 7시 25분)에 나오는 초등학생들이다.
연속극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강순이는 충청도의 한 두메산골에서 할아버지에게 한자와 무술을 익히며 명랑하고, 쾌활하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란다.
그러다가 사고로 할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이렇게 새로 만난 가족과 학교 친구들간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는 것이 중심 축이다. 또 강순이가 친할아버지와 엄마를 만나는 아슬아슬한 과정도 다루고 있다.
EBS교육방송이란 특징 때문인지 이 연속극의 주 시청자는 아직 어린이들이다. 연속극 <깡순이>의 홈페이지와 그동안 방송한 내용을 살펴보면 가족드라마를 표방한 여러가지 장치가 보인다.
그러나 주 시청자들은 초등학생과 5~7살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36회에 나오는 수봉과 현지의 대화 내용은 지나친 면이 다소 있다. 그 후에 이어지는 내용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이다.
*패스트 푸드점(낮)
태일과 현지 나란히 앉아 콜라 감자 먹고 있다.
현지 (태일에게 감자를 먹여준다)아!
태일 창피하게 왜 그래? 내가 먹을게.
현지 나 그럼 삐진다?
태일 (못이기는 척)아 알았어. 아!
현지 (태일 입에 쏙 넣어주고 애교)맛있어?
태일 감자 맛은 별룬데 니 애교 맛은 짱이야. 넌 어쩜 그렇게 귀엽냐?
현지 (쑥스러워 태일 때리며)아이 몰라, 몰라, 몰라.
태일 (터프하게 현지 손 목 휘어잡으며)우리 집에 인사갈래?
현지 (놀라)아우 야아. (애교 떨다 어딘가 보고 놀라)어 어 어뜩해?
태일 왜? (보면 해리와 수봉 송이가 쟁반 들고 저쪽에서 걸어온다)
-태일, 후다닥 현지 손 붙잡고 얼른 탁자 밑으로 숨는다.
-아이들, 태일과 현지가 보일 듯 말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앉는다.
-탁자 밑에서 숨죽이고 보는 태일과 현지.
(<깡순이> 38회분 중에서)
다큐멘터리나 교육 프로그램을 주로 보았던 EBS교육방송에서 85부작이나 되는 일일연속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신선했고, 때문에 무엇인가 타 방송과는 다른 차별성을 기대했다.
그러나 등장하는 인물이 스물살을 넘지 않은 12~13살의 초등학생이란 점, 쭉쭉빵빵의 선남선녀가 아닌 미성년의 아이라는 점, 드라마의 배경이 카페가 아닌 패스트 푸드점이란 점, 대학교나 직장이 아니고 초등학교라는 점을 빼면 19세가 표시된 연속극들과 그 골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자면, 수봉에게 거절 당한 현지가 같은 반 태일이로부터 "사귀자"라는 제의를 받은 후 학교 교정, 패스트 푸드점, 놀이터 등에서 친구들 몰래 만나는 과정도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속극에서 나옴직한 러브스토리이다. 또 강순이, 해리, 수봉이, 준희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4각관계도 그렇다.
물론 초등학생이라고 하여 그들만의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만, 그 과정이나 전개가 어른들의 세계의 축소판이란 점과 어른의 시각에 맞추어서 구성된 듯한 점 등은 아쉬움이 크다.
반면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한 적절한 화면 처리와 우리 것을 강조한 깡순이의 면면이 시선을 끌었고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흥미 위주로 이어가는 초등학생들의 애정 행각(?)에는 눈살이 찌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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