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 한 그릇을 위한 초복전야제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64]보신탕이 아른거려 아내를 속이기로 ...

등록 2004.07.20 17:38수정 2004.07.2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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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것이 다 들어가 있는 보신탕. 한결로 쫙쫙 찢어지는 보신탕은 소화 및 흡수력이 대단합니다.
별 것이 다 들어가 있는 보신탕. 한결로 쫙쫙 찢어지는 보신탕은 소화 및 흡수력이 대단합니다.김규환
삼복더위 시작


평소처럼 제헌절 저녁에 달력을 들여다보지 않고 초복(初伏)인 줄 알고 아내를 졸라 “우린 뭐 없냐?”고 부추겼다. 아내는 귀찮았던지 모른 척 했다. 토요일 밤이라 옆집에서는 무슨 잔치를 한 듯 요란했다. 뭔 사람들이 동네방네 떠나갈듯 왁자지껄.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떠나갈 줄 모른다. ‘어? 정말 너무 하는구만…. 자기네들만 사나?’ 어쩌질 못하다가 가게에 가서 맥주 한 병을 사와 홀짝홀짝 마시고 잠을 잤다.

열대성 저기압이 물러가고 뒤따라 북태평양 고기압이 밀려오면 열대야로 사람들이 고생깨나 한다. 닭은 목울대가 연신 골골골 할딱거리며 쉬지 않고 움직인다. 잔뜩 웅크린 채로 걷는 모습 처량하다. 시골집 주인을 따르던 잡종 개는 어찌나 더운지 혀를 내밀고 침을 질질 흘려 땅바닥에 닿게 한다.

닭이나 개나 복날 넘기면 다행이다. 하여간 사람이나 가축이나 삼복(三伏)더위를 나기는 쉽지 않다. 호박, 오이넝쿨마저 비실비실 축 늘어지고 아이 고추마저 쪼글쪼글 쪼그라들었다.

잠시 움직이면 “더워! 더워!”를 연발하는 요즘 같은 때에 시원한 샘물을 퍼서 등목 한번 해주면 좋으련만 길바닥이나 집채고 간에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덩어리니 여기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는 철길마저 엿가락처럼 구부러뜨릴 태세다. 대구는 한낮 기온이 35도를 넘었다고 한다. 차라리 비라도 한 모금 뿌려 식혀주면 좋겠구만. 한 여름 더위는 무더위니 습기를 가득 머금은 기온은 최고를 향해 내달리고 있다.

백숙을 위한 준비물은 간단히 씻기만 하면 되니 참 간편합니다.
백숙을 위한 준비물은 간단히 씻기만 하면 되니 참 간편합니다.김규환
에어컨 빵빵한 은행창구로 피서를 갈 수도 없고 일 내팽개치고 가까운 계곡으로 달려가기도 쉽지 않게 무더위 안에 갇혀 있는 2004년 7월 중순. 경제 사정도 최악이라 소문내서 밖으로 떠들고 다니며 먹고 마시러 다닐 수 없는 지경이니 더 숨이 막힌다. 마음이라도 편하면 좋겠다.


침만 꼴딱꼴딱 삼키며 하루를 날 수 없는 법. 벌써 직장인들은 오늘은 어디로 가서 무얼 먹어서 이열치열할까 다 정했을 것이다. 열로써 열을 다스리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이 싫어 냉면 한 그릇으로 대신하는 분들도 많을 테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호로록 후루룩 떠먹으면서 “어! 시원하다” 내지르는 이 한마디는 한국어를 갓 배운 외국인이나 아이들에겐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상황에서 이 말을 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해장(解酲)이나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뜨거운 음식 한번 먹고 땀 한번 쫘악 흘리고 나면 세상사 귀찮다가도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활력을 되찾곤 한다.


장마가 끝나 비가 그치더니 찜통더위다.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밤잠은 제대로 올 리 없고, 머리가 띵하다. 어제도 문 열어 놓고 자려다가 아이들 모기 물릴까봐 밖으로 나와서 잤다.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며칠 있으면 아예 짐을 싸서 강변으로 집을 옮겨야 할 것 같다.

닭을 그슬리면 껍질마저 쫄깃합니다. 삶아서 닭껍질을 뽕잎에 싸서 드시면 더 쫄깃합니다.
닭을 그슬리면 껍질마저 쫄깃합니다. 삶아서 닭껍질을 뽕잎에 싸서 드시면 더 쫄깃합니다.김규환
집에서 보신탕을 끓여먹던 신혼 초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늘이 초복이다. 남들은 회사에서, 이웃끼리, 친구와 함께 더위를 이길 궁리를 하는 초복이다. 개고기를 먹을까, 삼계탕을 먹을까, 수박 몇 덩이를 자를까 고민하고 있는 그들이 부럽다. 소호족이나 자유업, 혼자 근무하는 사람들의 비애를 그들이 알까?

결혼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고기를 집에서 먹을 수 있었던 건 내 몸이 허한 구석이 드러났던 신혼 초다. 그나마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앞으로 그런 상황이 죽 이어질 줄 알고 희희낙락 했던 바보 같은 나였다. 드디어 어릴 적 어머니께서 미신을 믿어 “먹지 말라”고 하시던 굴레에서 당당히 해방되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다.

허락을 받고 아내가 없는 동안에 토란대, 고구마순 등 말린 나물을 불렸다. 홍고추와 들깨를 갈아 물을 내고 마늘 생강을 준비해 놓았다. 맹물로 먼저 끓여 한번 물을 따라버리고 된장 간을 약하게 하여 슬슬 익혀나갔다. 준비해 둔 양념과 국물을 마저 넣고 푹푹 삶아주니 예닐곱 근 되는 고기는 참 맛있게도 삶아졌다.

그 솜씨는 음식까지 파는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손님용으로 길렀던 개를 열댓 마리 처분해 전라도식으로 보신탕을 끓여주던 실력이었다. 국과 탕이 전공인 나는 녹슬지 않은 내 음식 비결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대파를 오므려 넣고 부추를 숭숭 썰어 곁들이고 매운 풋고추를 다져서 탕에 탔다. 그 진한 국물에 밥을 조금 말고 소주를 한 잔 마시니 그 동안 쌓였던 노폐물은 땀을 따라 밖으로 모두 나와 몸이 가뿐해졌다. 이사 간지 얼마 되지 않아 혼자서 이틀에 걸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그렇게 내 생의 봄날은 화려했다.

그런데 웬 걸. 그걸로 끝이었다. 일산 쪽에서 토종개고기를 사다주기까지 했던 아내였지만 그걸 먹고 나자 표독스럽게 변해갔다. 서서히 자신의 성장과정을 이야기 하더니 언젠가는 법당에 가서 절을 하라고 한다. 장모님은 시주를 하고 이름까지 올리라고 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밥도 부처님이 농사짓지 않은 쌀 아니면 먹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파, 마늘, 부추, 양파, 달래는 아예 먹질 않는 처갓집이다. 이 상황에서 개고기까지 집으로 사오면 아내에게 바가지로 욕을 먹을 건 뻔하다. 아니 애걸복걸 복달아난다고 야단법석일게 분명하다. 차마 개고기 먹겠다는 말을 못하고 지내온 몇 년 동안 불쌍한 닭만 수십 마리 해치웠다. 가련한지고.

이렇게 몇 년을 더 살면 아마 나는 살만 뒤룩뒤룩 찌고 허전함만 가득할지 모른다. 즐기지는 않지만 매년 복날이면 한번 먹어봐야지 하면서도 잊고 지나치기 쉬운지라 아직도 포기를 못하고 나는 꾀를 내기로 했다. 내 잔꾀를 아내가 알 턱이 없다. 그럼 오늘은 그 비밀을 털어놓으련다.

마지막에 보신탕에 밥 비벼먹고 나오면 무척 배가 부릅니다.
마지막에 보신탕에 밥 비벼먹고 나오면 무척 배가 부릅니다.김규환
보신탕 한 그릇을 위한 특별한 초복 전야제

어제는 아내에게서 퇴근 무렵 전화가 왔다.

“뭐 사갈 것 없어요?”
“특별한 게 없는데…. 소주나 한 병 사오시던가….”
“그럼 아이들 과일이나 좀 사가야겠네요. 끊어요.”
“잠깐만! 거기 오늘 닭이나 먹게 토종닭 한 마리만 사와요. 가만히 있어 봐요. 찹쌀, 오갈피, 엄나무, 마늘, 생강, 밤, 은행, 황기는 집에 있으니까 닭 한 마리면 되겠네. 늦지 말고 와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려오니 아내가 닭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을 맡기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약 백숙을 만드는 건 언제나 내 차지기 때문이다. 4~5인 분은 넉넉할 큰 닭 겉을 살짝 불에 그슬려 잔털을 제거했다. 조금 더 태워 닭 껍질이 쫄깃하도록 하고 물에 깨끗이 씻었다.

마늘과 닭만 먼저 넣고 재료가 준비 되는대로 약재를 넣고 끓였다. 소금 조금도 쫄깃하도록 넣었다. 마지막으로 닭이 식어도 더 보드랍게 하기 위해 쌀이 퍼질 때까지 끓이니 간단히 요리가 끝났다. 양념과 소금, 양파와 풋고추에 김치 하나 썰어 아이들까지 5명이 즐거운 만찬을 했다.

다른 날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향기로운 백숙을 끓였던 이유가 있다. 개고기를 먹기 위한 전야제였던 셈이다. 바로 오늘이 초복이지 않은가. 오늘은 그냥 밖에 외출을 가장하여 4년여 만에 보신탕 한 그릇 먹고 오려고 대충 해치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내 심보를 아내가 알까. 아내가 내 깊은 속뜻을 알아차릴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부터 누구랑 가정집 같은 편안한 집에 가서 보신탕을 먹을지 사람을 골라봐야겠다. 행여 들키면 내가 그 맛난 홍어탕을 가르쳤으니 당신도 한 가지는 양보하라고 하면 안 될까. 정 안되면 예전 어머니께서도 아버지가 밖에서 드시고 오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았다고 해야지.

못 먹게 하니 더 먹고 싶어지는 걸까. 어제 오늘 난 보신탕 생각에 일손이 잡히질 않았다. 또한 아내를 속이고 있다. 이 간절함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이건 어제 먹었으니 오늘은 누가 공으로 준대도 먹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건 어제 먹었으니 오늘은 누가 공으로 준대도 먹지 않을 생각입니다.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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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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