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종칠뻔 했던 야구와 내 인생-그래도 그 시절 쏘다니며 놀았던 때가 그립습니다.여행스케치
시골길을 혼자 다니는 건 별 재미가 없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빈 지게 다리를 ‘탁탁’ ‘톡톡’ 작대기로 두들긴다. 나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정겹다. 심심함을 싹 가시게 하기엔 역부족이다. 돌멩이가 발에 채이면 가던 길을 멈춘다. 주먹돌을 주워 한 손으로 띄우고 지게 작대기를 사정없이 휘두른다. 첫 번째 볼! 두 번째도 보기 좋게 빗나간다.
바닥에 떨어진 돌을 보고 자신의 실력 없음에 한탄한다. 자존심에 먹칠을 했지만 그냥 물러설 수 없다. 삼세 번까지는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적당한 높이로 던져 올리고 얼른 작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힘껏 치자 감기듯 넘어질 듯 휘청휘청. ‘딱!’ 소리와 함께 개울로 휘휘 돌며 날아간다. 물장구가 쳐지자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이런 꼬맹이들 놀이의 기원은 무엇일까? 바닥에 있는 작은 자를 튕겨 개잡기, 수비가 구멍으로 던져주는 작은 자를 되받아치기, 긴 자를 들고 있는 손에 작은 자를 살며시 던져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치는 방법 등이 있는데 공통점은 멀리 쳐내는 자치기다.
우린 작대기나 긴 막대기만 보면 뭔가를 쳐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풋감이 마파람이나 태풍에 떨어지면 툭 쳐낸다. 생감물이 빠지지 않아 옷은 언제나 감물 투성이었다. 여름이 깊어 가면 똘배를 따와서 멀리 날려보내기도 했다. 그 기분 얼마나 짜릿했던가.
개중 가장 자주 갖고 놀았던 것이 돌이니 간혹 이웃집 장독을 깨기도 하고 어른들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 집안 간 싸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깡촌에 TV가 보급되던 1978년 4학년 때부터는 건전한 놀이로 전환하였으니 그게 바로 야구다.
조선 최초 야구경기를 다룬 영화 < YMCA야구단 >은 1905년 벌써 개화기를 거쳤지만 우리 마을은 그제서야 눈을 뜨게 된다. 라디오로 중계를 해주던 때까지 우린 야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전설의 고교야구가 한창일 때도 잠자고 있었던 동네다. 세광고, 선린상고, 대구상고와 대구고, 부산상고, 천안북일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에 선동렬의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한창이던 때다.
아나운서는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의 생생한 광경을 빠른 목소리로 전달했다. “열광의 도가니! 도가니!” “쳤습니다. 홈런!” 늦여름 봉황기가 시작되면 예선 없이 전국의 60여 팀이 모두 참가하는데 그 때 등장한 신흥명문이 광주 진흥고다. 동향이라는 점과 김정수 선수의 원맨쇼에 매료되었다.
야구(野球)! 나에게 둘도 없는 스포츠다. 내 인생을 뒤바꿔놓은 이 경기에 나도 휩쓸려 살았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아버지 출타 시에는 꼴망태에 라디오를 넣어서 논두렁 베는 도중 옮겨가며 중계를 들었다. 집에선 스피커가 달달달 떨며 찢어지도록 볼륨을 최대로 높여놓고 쇠죽을 쒔다. 주말 이틀은 옆집 TV를 껴안고 살았다.
그 시절 야구는 그냥 넓은 들[野]과 둥근 공[球]만 있으면 되었다. 방망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긴 게 없으면 빨래 방망이라도 갖고 놀았다. 돼지오줌보를 차고 놀았던 아이들 아니던가. 촌구석에 야구가 보급되면서 대대로 내려오던 놀이가 하나둘 자취를 감추는 역적노릇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만큼 매력 덩어리가 야구다.
닫혀 있던 마을도 5학년이 되던 해 몰라보게 변화하고 있었다. 저수지라기엔 규모가 몇 배나 큰 송단제를 굴착기, 불도저, 대형트럭이 들어와 막기 시작했다. 인근 다섯 마을 사람들로도 부족해 외지에서도 실려 오고 한밭집이 들어섰다. 어른들은 현금을 맛보는 재미에 집안 살림을 등한시 했으니 아이들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4학년 가을 광주 야간상고에 진학한 동네 형들이 배트, 실밥 있는 공, 글러브와 포수미트 및 마스크를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숫자가 부족했기에 곧바로 멤버가 되었다. 벼를 벤 허허벌판 눈이 꽁꽁 얼어붙은 논배미에서, 저수지를 막기 위해 길을 넓히다 하천부지를 득득 긁어 평평하게 다져놓은 공터로 옮겨 다니며 야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돌밭과 얼음이 언 논에서 형들이 던진 공은 살인무기였다. 맨손으로 공을 받다가 얼굴에 맞기도 했으며 서로 하지 않으려는 포수를 번갈아 보다보니 몸 곳곳이 공에 맞아 탱탱 부어올랐고 멍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