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존망의 갈림길에 서다

장재구 회장 증자 약속 불발...7월 급여 미지급 등 내부동요 커

등록 2004.08.06 10:35수정 2004.08.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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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사옥 전경. 창간 5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는 최근 급여를 지급하지 못할 만큼 심화된 경영난 등으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한국일보 사옥 전경. 창간 5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는 최근 급여를 지급하지 못할 만큼 심화된 경영난 등으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오마이뉴스 김태형

창간 50주년을 맞은 한국일보가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국일보는 이른바 '조중동'과 함께 '4대 일간지'로 불렸으나 지금은 존망의 기로에 선 형국이다.

한국일보가 어렵다는 얘기는 수 년 전부터 언론계 안팎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려운 상황이 보다 구체적이고 절실한 상황이다. 우선 7월분 급여가 지급되지 않았고, 퇴직금이라도 제대로 받기 위해 퇴사한 직원들이 속출하고 있다. 기자들의 이직행렬은 언론계에서 '탈출 러시'로까지 불리고 있다.

한국일보 직원 410여명은 지난 7월 27일 회사 요구에 따라 임금삭감과 퇴직금 누진·가산제 폐지에 동의한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제출했다. 700여명 가운데 약 60%에 달하는 인원이다. 이들은 동의서에 따라 연봉 3천만원 미만인 사원은 10%, 3천~4천만원 사원은 30%, 4천만원 이상은 50%씩, 평균 약 20%의 임금이 삭감될 처지에 놓였다.

한국일보 경영에 빨간불이 들어온 것은 한 두해 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장재구 회장은 "올해 말까지 300억원을 증자하지 못할 경우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각서까지 쓰고 전 직원의 임금 삭감을 요구했지만 내부 구성원의 시선은 차갑다. 장 회장의 증자 약속은 이미 2년 전에 지켜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불발된 장재구 회장의 '증자' 약속

장재구 회장은 2002년 9월 채무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MOU)을 체결하며 그해 안으로 500억원을 출자키로 약속했으나, 200억원 증자 이후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채권단의 양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장 회장은 지난 7월 23일에도 대표이사직을 걸고 올 7월까지 100억원, 12월말까지 추가로 200억원을 증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약속마저 지켜지지 못했다. 7월분 100억원이 8월 5일 현재 증자되지 않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위원장 전민수) 관계자는 지난 4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과연 장 회장이 한국일보를 살릴 마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며 퇴진투쟁을 선언했다.

노조는 "장 회장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빚어진 이자손실 부분과 기회비용 부분만은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업무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장 회장을 고소·고발 조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국일보 기자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회장 고재학·이하 기자협)도 "경영위기 해결의 관건은 장 회장의 증자약속 이행 여부"라고 조속한 이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5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7월분 증자에 대해 "미국에서 자금이 들어오는 과정에 실무적으로 차질이 빚어져 늦어지고 있다"며 "채권단에게 구두로 양해를 구했다"고 밝혔다.

윤순환 경영기획부장은 "그동안 증자 약속이 몇 차례 연기됐기 때문에 경영진의 300억 증자 약속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 같다"며 "<미주 한국일보> 부동산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해 올해 말까지 300억 증자를 반드시 하겠다"고 말했다.

윤 부장은 이어 "만약 300억 증자가 힘들어지면 <미주 한국일보> 부동산을 채권단이 매각 처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증자는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사지부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사옥 앞에서 경영진의 일방적인 자구계획안 진행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사지부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사옥 앞에서 경영진의 일방적인 자구계획안 진행에 항의하는 농성을 벌이고 있다.오마이뉴스 김태형

99년부터 지불한 이자만 1200억원... 채권단 '이자챙기기' 비판도

장 회장의 증자약속 불이행에 대한 불신은 채권단에 대한 불만과 이어져 있다. 채권단이 한국일보 회생보다는 증자이행 약속 연기로 인해 추가 발생하는 이자 수익 챙기기에 급급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그것이다.

채권단에서 파견된 고낙현 한국일보 자금관리단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채권단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언급할 게 없다"고만 짧게 답했다. 지난 99년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이후부터 올해까지 한국일보가 채권단에 지불한 이자만 12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노조는 "채권단 입장에서는 한국일보가 계속 남아 있어야 이자도 받고 원금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증자 기한을 계속 연기시켜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조는 "채권단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도덕적 책임까지 면제된 것은 아니다"며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에 대한 압박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윤순환 경영기획부장은 노조의 지적에 대해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도 일면 있겠지만 금융기업이 이자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며 과도한 비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윤 부장은 "채권단이 공동관리를 중단하면 사회적 파장이 크기 때문에 한국일보가 계속 적자나는 상황에서도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 부장은 7월급여 미지급과 관련, "100%는 힘들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 50% 정도라도 일단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급여 미지급으로 인한 사원들의 사기저하와 한국일보 경영위기 확산이 심각히 우려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임금 삭감 동의서'를 받는 과정에서 회사를 떠난 53명(5일 현재)의 퇴직금 문제에 대해서도 윤 부장은 "가족 같이 함께 일했던 분들을 그렇게 떠나보낸다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며 "은행 어음을 발행해서라도 반드시 퇴직금을 지불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일보, 위기 극복할 수 있을까

한편 노조, 기자협, 경영진 3자는 한국일보가 심각한 경영위기 상태에 처했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노조는 지난달 19일 경영진에게 ▲증자금 300억의 우선 완납 ▲주주 가지급금 조속한 회수 ▲한국일보-미주한국일보간 컨텐츠 사용료 계약의 매출전환 등의 자구대책안을 제시했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회사측과의 단체협상을 제안해 놓은 상태이다.

회사측은 노조의 자구대책안에 대해 ▲증자금 문제는 연말까지 해결하고 ▲주주 가지급금 문제는 현재 소송과정에 있거나 회수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고 ▲콘텐츠 사용료 역시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부분은 법리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으니 앞으로 논의 및 검토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기자협은 ▲사원들도 고통분담을 하고 ▲대주주는 증자약속을 지켜야 하고 ▲채권단도 현재 체결된 MOU를 한국일보가 회생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고쳐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영정상화 방안을 둘러싼 이견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경영진에 대한 노조와 기자협의 불신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경영진이 약속한 증자부분은 계속 지켜지지 않으면서 사원들의 고통분담만 가중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노조와 기자협은 이미 미지급 급여문제 등에 대해 소송절차를 밟고 있다.

종이신문 시장의 장기불황도 한국일보 정상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차별적인 논조로 한국일보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데는 구성원 모두 동의하고 있지만 신문광고의 장기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같은 환경에서 매출증대가 쉽게 이뤄지기 힘들다는 게 문제다.

편집국의 한 중견기자는 "신문시장 독과점 규제·공동배달제 도입 등 최근 법제화 논의가 되고 있는 언론개혁 움직임이 한국일보 회생에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계 주변의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 이유는 한국일보 사태가 워낙 '오래된 병'이라 고치기가 어려운데다 노사간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져 '특단의 조치'가 없는한 사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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