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16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10 09:19수정 2004.08.1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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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후, 어둑어둑할 무렵 에인의 군사들이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도착했다. 바다가 가까워 퇴적층이 넓었고 갈대가 무성한 곳이었다. 군사들은 곧 조를 갈라 야영작업을 시작했다. 일부는 천막을 치고 또 일부는 갈대를 베어 육지 쪽 천막 앞으로 울타리를 세우는가 하면 말과 마차는 물가 쪽으로 배치하는 등 모두 일시분한하게 움직였다. 사방이 어두워 캄캄했으나 그들은 불도 밝히지도 않고 일을 했다.

작업이 끝난 것은 밤 10시경이었고 그때 양유 마차 한 대가 조용히 다가왔다. 제후였다. 그가 목부로 위장한 것은 두두와 무사히 접선을 했다는 뜻이었다. 강 장수가 '내일 아침부터 그 누구도 낮에는 갈대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시를 은 장수에게 내린 후 제후를 맞아 에인의 천막으로 갔다.


군주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제후는 어제도 오늘도 양유마차를 끌고 성으로 갔다. 한데 오늘은 날이 어두울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에인은 애가 말라 계속 천막 앞만 서성였다. 두두의 신분이 발각되었는가. 그렇다면 닌은 도대체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두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닌이라도 대신 제후를 만났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모든 사정을 일러줘야 하지 않는가.

"마침내 오고 있습니다."

강 장수가 알려주었다. 그때 제후의 마차가 갈대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에인이 서둘러 물어보았다.

"왜 이렇게 늦은 것이오?"
"양유를 사오느라 그리 되었습니다."
"양유는 또 왜요?"
"오늘따라 파수 군사들이 많았습니다. 빈 마차가 의심을 받을 것 같아 시장에 들려 양유를 채웠지요."
"그래, 내일 성안 일은 어떻게 진행된답디까?"
"성문은 내일 아침 일찍부터 열리고 본격적인 잔치는 오전 10시쯤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열시라면, 거기까지 도착이 두 시간…. 그러면 8시 전에는 출동해야 합니다."

강 장수가 재빨리 결론을 내리자 옆에 서 있던 참모들이 너무 이르다, 그보다 오후 시간, 주흥에 한창일 때 치는 것이 낫다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나 강 장수 생각은 달랐다. 무릇 잔치란 그 준비과정이 가장 바쁜 법이고, 그땐 모두 정신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어 여타의 일엔 신경 쓸 겨를이 없으며, 바로 그때 치고 들어야 승산이 가장 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잔치가 시작되는 시간에 군사들의 사열식도 병행될텐데요?"
"사열식은 전시용이지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오. 어쨌든 지금 당장 작전 점검에 들어가는 게 옳겠소."

에인이 말했다. 사실 시간이 별로 시간이 없었다. 더욱이 아침전투였다. 눈을 뜨자마자 출정을 하려면 지금 모든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게다가 큰 도시였다. 강 장수의 말처럼 그들이 박힌 돌이라면 빠르고 정확해야만 그 돌들을 제거할 수가 있고 그러자면 무기도 다시 점검해둘 필요가 있었다.


은 장수와 강 장수는 곧 아장들을 소집해 기병과 보병의 편대, 쇠뇌와 표창 병의 위치 등 그 세밀한 작전에 들어갔고 선인들은 군사들에게 숫돌을 꺼내주며 창을 갈게 했다. 낮엔 행동을 제한했던 터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군사들은 한 두릅에 엮인 듯 잘 움직여주었다.

모든 정비가 끝났을 때는 벌써 한밤이었다. 군사들도 모두 잠자리로 돌려보낸 후 강장수가 참모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도 눈 좀 붙여둬야 할 거요."

에인이 먼저 자기 천막으로 향했다. 그는 이상하리 만큼 마음이 가라앉았다. 3천의 군사와 5백의 기병으로 강 사이의 땅 중 가장 큰 도시를 치는데도 한점 두려움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머잖아 이 하늘 전체가 천신에게 바쳐진다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신에게 하루만 기다려달라는 보고를 할 참이었는데 그를 반긴 것은 별들이었다. 선명한 별자리들이 각자 자기 자리를 알리고 있었다. 문득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항상 별의 위치를 확인해라. 그러면 별들은 네가 서 있는 곳과 가야할 방향을 일러줄 것이다.'

에인은 '예, 말굽칠성도, 하늘바다를 헤어가는 하늘나루도, 직녀별, 견우별, 보기 힘든 남두육성까지도 반짝반짝 자기의 궁전을 보아달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다시 스승의 말이 들려왔다.

'하늘에는 삼원과 28수의 별나라가 있다. 남두육성까지 저렇게 제 빛을 자랑하는 것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 스승님, 지금이 바로 10월 하순, 잔뜩 깊어버린 가을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그다지 춥지 않으니 내일 출정에도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 천체선인이 조용히 다가서며 말했다.

"별이 많은 밤에는 밖에 오래 서 계시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알았소, 곧 들어가지요. 한데 내일 날씨는 좋다고 했지요?"
"예, 비는 오지 않습니다."
"그럼 구름이 많소이까?"
"아니오, 해도 뜹니다."
"아주 잘된 일이 아니오. 좋은 기회에 좋은 날씨…."
"그러나 가끔은 가장 좋은 일 뒤에 궂은 일이 기다리기도 하지요."
"무슨 말이오. 내 운에 그런 것이 있소?"
"아닙니다. 장군님의 운도 시기에 맞게 꽉 찼습니다."
"그런데 궂은 일이 기다린다는 것은 또 무엇이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일은 작은 일에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니 출전 때 앞장만 서시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것만 지키신다면 모두가 소원대로 되실 것입니다."
"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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