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CBS-TV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제작팀은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친일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친일이었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며 교계 지도자로 건재했다. 다음은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방송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일 정도로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까지 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며 파쇼화 체제로 돌입,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기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가장 먼저 항복한 교단은 감리교였다. 감리교의 양주삼 초대 총리사는 1936년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또한,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기독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기독교의 친일 행위가 본격화됐다.
당시 장로교총회 부회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는 각 노회 임원들을 인솔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또한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1940년대에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鐘)을 떼어다 바쳤다. 심지어 교회를 통폐합 한 뒤 교회 건물과 부지를 일제에 상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부차장을 지내다 귀국한 정인과 목사는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을 창간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의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일제는 예수를 왕으로 표현하거나 재림에 대한 찬송가를 일체 금지시켰으며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찬송 또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기미가요가 울려나왔다.
신사참배를 가장 먼저 결의한 감리교는 1940년 감리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이른바 내선일체론에 가담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감리교 감독은 교회의 철문을 뜯어 헌납하고 교회 통폐합을 실시해 일제의 전승을 위한 물질 지원에 앞장섰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박희도 전도사는 1939년 <동양지광>이라는 친일잡지를 창간한 뒤 이 잡지를 통해 정인과, 전필순 등 친일파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참가를 독려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일제 초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 말기가 되면서 기독 청년을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내모는 친일 주력인사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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