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과 둘러앉아 이야기하던 날

아줌마의 자녀 동반 유학일기 (14)

등록 2004.08.16 17:43수정 2004.08.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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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면 부모 오리엔테이션의 밤 (parent orientation night)이라고 해서 담임선생님과 상견례 하는 날이 저녁시간으로 잡혀 있다.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는 대개가 오후 6시 이후에 일정이 짜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일 때문에 낮에는 학교행사나 모임에 참여할 수 없는 부모들도 아이에게 관심을 갖고 학교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날 학부형들은 자기 아이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는 책상에 앉아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교와 학급의 전반적인 행사, 규칙과 벌칙, 커리큘럼, 부모-교사 컨퍼런스(parent-teacher conferences), 방학일정 등등에 관한 유인물과 설명을 선생님으로부터 듣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때 교실의 책상은 아이들 대신에 학교를 찾은 부모나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로 가득 채워진다.

같은 학군(district)에 소속되는 초·중·고학교들은 일정이 같게 짜여져 있어서 미리 계획을 세우기에 여러 가지로 편한 부분이 많다. 현근이와 예근이가 다녔던 학교(공립학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일년에 두 차례에 걸쳐서 공식적으로 부모와 선생님이 만나는 날 (Parent-Teacher Conferences)이 있다.

희망하는 부모에 한에서 약속된 일정에 따라 아이의 학교를 방문하게 된다. 보통 초등학교에서는 거의 모든 부모들이 이날에 선생님과 만나서 아이의 생활태도, 학습태도, 성적표, 교우관계 등을 중심으로 해서 선생님과 대화(상담)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중학교의 경우는 학생이 성적이 많이 뒤처지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주로 교사와의 면담을 신청한다고 했다. 지정된 컨퍼런스날에 교사와의 면담을 원하는 경우 30분 정도의 간격으로 상담시간이 할당이 되는데 원하는 날짜별로 1순위, 2순위, 3순위 식으로 표시해서 학교로 보내면 선생님이 전체적인 스케줄을 조율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날짜와 시간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아이 편에 통보해준다.

긴장했던 선생님과의 만남

나는 두 아이의 학교에 모두 가기로 결정하고 적당한 시간을 선택해서 면담 신청을 했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학부형의 자격으로 선생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여러 가지로 긴장이 되고 걱정이 앞섰다.옷은 무엇을 입고 가야 하나? 미국의 부모들은 학교를 방문 할 때는 정장을 입고 가나? 처음 만났을 때 인사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말을 잘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하나? 빈손으로 가야하나?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미국의 학교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던 이야기가 적지 않은데도 정작 내 문제로 부딪쳤을 때는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장이라고 딱히 가져온 것이 없어서 검정색 긴 니트 스커트에 약간 반짝이는 스웨터를 편안하게 입기로 했다. 노란색 열매가 열리는 자그마한 화분을 준비해서 현근이 학교를 먼저 방문했다.

현근이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MS. Q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새침하게 말을 하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현근이의 영어를 도와주는 보조 선생님, 현근이의 수학을 담당하는 선생님(수학은 5학년 교실에 월반해서 듣고 있었음)까지 같이 나란히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 보조 선생님은 현근이가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놀랍도록 영어를 빨리 흡수하고, 이해하는 정도가 많이 향상 되었다고 한참 현근이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셨다.


MS. Q 선생님은 통지표상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록이 의미하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한 후 수학(Math)을 뺀 나머지 특히 언어(영어)평가가 평균보다 뒤떨어진 것을 가리키면서 다음 4학년 올라가면 훨씬 좋아 질 거라고 현근이 얼굴을 쳐다보면서 격려를 해주었다. 선생님은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주도해갔고, 나는 열심히 선생님의 말을 놓치지 않고 따라 가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통지표(Report Card)는 A4용지 정도의 얇은 종이에 아이의 출석 (Attendance Record)이 표시되어 있고, 학업성취도 정도가 과목별로 자세하게 등급으로 나뉘어져서 표시가 되어 있다: A, B, C, D 또는 Strength(강점), Progressing(향상), Weakness(약점)/ Excellent(우수함), Satisfactory(만족스러움), Needs to improve(향상이 필요함), Unsatisfactory(만족스럽지 못함)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각각의 학생들에게 짧은 격려의 글을 통지표에 써주었다.

Hyun Geun, I've loved this time with you. Continue to reach for your dreams. You have many talents. I'm proud of Hyun Geun and the work hee is doing. You are special!

현근아, 너와 같이 했던 올해가 너무 즐거웠단다. 너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계속 전진해라. 너는 참으로 많은 재능을 갖고 있는 아이란다. 나는 현근이와 현근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너는 특별한 아이다.


현근이 학교에서 하는 행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적극적으로 참가하려 애썼다. 특히 매년 두 차례에 걸쳐 있는 교사 학부모 컨퍼런스는 빠지지 않고 신청을 했다. 4학년 때는 선생님께 5불(6000원) 정도 되는 아로마 양초를 선생님께 감사의 표시로 사가지고 간 적이 있었다. 다음날 현근이를 통해서 선생님은 땡큐 노트(Thank you note: 감사카드)를 보내왔다. 보내준 아로마 양초의 냄새가 향긋하고 감사하게 잘 쓰겠노라는 감사의 글이 담겨져 있었다. 신선한 기쁨이었다.

이런 저런 작은 선물들을 나도 학부모로부터 받아 본 적은 있지만 감사함을 담아서 답례를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부모들이 학교에 가는 걸음이 썩 가볍지만은 않다. 학교를 찾아가는 주목적은 어디로 가고 무엇을 선물로 사 가지고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이 먼저 앞서는 경우가 있다.

미국도 지역마다 학교마다 물론 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실제로 미국의 부모들은 그런 생각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학교를 찾는 그들의 복장도 상당히 캐주얼하게 보였고 격의 없이 자연스럽게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둘러앉아 선생님들과 나눈 이야기들

중학교도 초등학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부모와 교사 컨퍼런스를 갖는다. 예근이가 8학년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 후 처음으로 선생님과 사전에 합의된 시간에 맞추어서 학교를 방문했다. 예근이 앞에 한 학생이 상담 중이라 밖의 대기자 의자에 예근이와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되었다. 미국의 중학교는 우리나라처럼 반과 담임제도가 없다. 그 대신에 예근이네 학교는 학년을 커다랗게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그룹에 동물의 명칭을 붙였다.

예를 들면 쿠걸(Cougar), 라이온(lion), 레퍼드(leopard) 이런 식이었다. 예근이는 쿠걸팀(Cougar: 사자의 종류)에 소속 되어 있었다. 쿠걸 팀을 담당하면서 예근이를 가르치고 있는 주요 교과 선생님이 한 학생의 상담을 위해서 한자리에 다 모여서 반원 형식으로 앉아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예근이와 나는 그들을 향해서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대표 선생님이 각 교과 선생님 소개를 간략히 하면서 인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각 교과 선생님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예근이의 학습태도와 성적의 향상 정도를 비롯해서 이런 저런 충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 당시 예근이는 보통 반 (regular class)에 들어가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8학년 내내 전 과목 에이(A)를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고, 한국에 혼자 남아 있는 아빠에게 자랑삼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우수 반을 (honor class)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던 터였다.

상담하면서 그런 예근이의 생각을 선생님들께 말하자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예근이 성적으로 당장 우수 반에 올라가서 공부할 수 있다. 단 그것의 결정은 전적으로 본인이 내려야 되고 결정된 사실을 학교 측에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예근이는 지난 7학년 6개월을 몸서리치도록 외롭게 보냈던 터라 이제 겨우 익숙해지고 알게 된 친구들하고 헤어지는 것이 싫으니 이대로 8학년을 (미국에서는 중학교 졸업학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상담으로 잡혀진 시간이 아침 시간이라 학교에 갈 때 선생님 드시라고 도넛을 사가지고 갔었다. 다섯 명의 모든 선생님들은 도넛을 하나씩 들어 올리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두 달 전에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한 학생의 엄마로부터 느닷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나로 하여금 미국에서 예근이 학교 컨퍼런스에 갔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학교에서는 거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회성이 완전히 떨어져서 거의 자폐아 정도로 접어 두었던 학생이었다. 집에서는 선생님들 말투와 흉내까지 내면서 그지없이 명랑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는 거의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적어도 엄마의 설명에 의하면 나를 비롯한 학과 선생님들의 판단은 잘못돼 있었기 때문이다. 딸 아이의 반에 들어가는 선생님들과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달라고 어머니는 전화에 대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부모가 교사에게 애걸해야 할 문제란 말인가? 부끄러웠다.

적어도 교사와 부모가 신뢰감을 갖고 정기적으로나마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렸더라면, 적어도 일년에 두 차례 정도만이라도 부모와 교사가 진지하게 만나서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허심탄회하게 교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하는 생각이 전화통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원을 그어서 빙 둘러서 앉아 있던 예근이의 미국 교과 선생님들의 진지한 모습이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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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육현장에서 일하고 있음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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