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만난 하얀 눈꽃송이 '으아리'

내게로 다가온 꽃들(75)

등록 2004.08.23 16:49수정 2004.08.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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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으아리는 산기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낙엽성 덩굴식물이라고 식물도감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 더 덧붙여서 해안가에서도 잘 자란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산기슭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 소담스럽게 쌓인 듯 피어 있는 으아리의 행렬도 아름답지만 제주의 해안가에 피어 있는 으아리는 마치 부서진 포말이 이내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 머무는 듯한 모습으로 검은 돌들과 어우러진 흰색 꽃은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얼핏 보면 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꽃받침이고 꽃은 하늘을 향해 술처럼 올라간 것이 꽃이랍니다. 주인공과 조연이 바뀐 것 같지만 헛꽃도 아닌 꽃받침이 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꽃이 작거나 못생겼으면 곤충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헛꽃을 다는 경우가 많은데, 헛꽃도 아니고 꽃받침이 화사함으로 곤충들을 유인하는 꽃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김민수
김민수
숲 가장자리에 있는 으아리들은 덩굴식물답게 나무들을 의지해서 하늘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늘로 향하다 더 오를 곳이 없으면 그 곳에 자리를 잡고 폭죽같은 하얀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그렇게 하나둘 하얀 꽃망울들이 피어나면 마치 하얀 눈이 가득 내린 듯하니 마치 겨울나라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부터 피어나기 시작하니 어쩌면 무더위에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 위해서 피는 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으아리는 단연 해안가에서 만난 으아리입니다. 그 곳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척박한 환경을 딛고 피어난 꽃이라서 그런지 산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만나는 으아리보다 꽃잎도, 꽃도 야무지고 향기도 좋았습니다. '아, 그래서 자연이구나!'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김민수
김민수
우리 사람들은 때로는 환경을 탓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어떤 중년 부인이 매일 밤 신에게 '우리 남편 술 좀 끊게 해 주십시오'하며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집안에 여러 가지 안 되는 일들을 돌아보면 그 모든 원인이 남편이 술을 먹는 데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든지 신이 그 기도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중년부인은 행복해졌을까요?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 전에는 무슨 일이 틀어지면 남편이 술 먹는 것 때문이라는 핑계라도 댔는데 이젠 그 핑계할 곳도 없어서 더 불행해졌다네요.


물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지만 환경을 탓하기 보다는 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가 또한 중요하겠지요.

김민수
김민수
으아리는 천삼(天蓼), 선인초(仙人草)라고도 하며 한의학에서는 으아리의 뿌리를 위령선(威靈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으아리의 여러 다른 이름 중에서 맘에 드는 이름 하나가 선인초(仙人草)입니다.


뭔가 신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한 꽃을 바다를 배경으로 바라보니 제주인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이어도'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어도에는 선인들만이 살겠죠? '이어도'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현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이상향 '이어도'로 그 현실의 고단한 삶들을 극복하고자 했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현실에 안주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이들은(지금도)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는 관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일 것입니다. 그저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다 자기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며, 자기가 누구의 수고를 훔쳐 먹고 사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현실이 족한데 그들에게 '이어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땀 흘려 일하는 이들, 그렇게 땀 흘려 일해도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어도'에 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김민수
김민수
으아리를 만난 지 이틀이 지난 날 태풍 '메기'가 바람을 몰고 와 팽나무를 흔들어대고, 미친 듯이 창문 틈을 파고 들어옵니다. 태풍 '메기'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는 이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태풍에 해안가의 으아리는 어떻게 지낼까요? 흔들리고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겠죠. 그 몸이 갈갈이 찢어 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히 태풍이 지나간 그 자리에 넉넉하게 피어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도 모를 그 믿음을 제주의 들꽃들, 흔하디 흔하게 피어 있는 길가의 꽃들을 통해서 얻습니다.

김민수
태풍 '메기'가 지난 후 바다는 저 깊은 심연까지 온통 뒤집어졌는지 그 푸르던 바다가 황토색이 되었습니다. 해안도로 곳곳에도 파도가 넘쳤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으아리는 그 곳에 그렇게 청아한 모습 그대로 피어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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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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