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수첩 들고 시장에 간 까닭은?

도서관 '글쓰기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3)

등록 2004.08.24 01:00수정 2004.08.30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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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장에서 글감을 찾아 어슬렁 거리는 두 아이

시장에서 글감을 찾아 어슬렁 거리는 두 아이 ⓒ 안준철

도서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부상설시장을 찾아간 것은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던 폭염의 날씨가 조금은 풀이 죽긴 했지만 오후의 햇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습니다.

몇 아이는 수첩을 사러 문방구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시장에 가까워지자 저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a 시장에서

시장에서 ⓒ 안준철

"자, 지금부터 30분 동안 시장을 구경하고 여러분이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들을 글로 써보세요. 특히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의 표정이나 말투, 손님들과의 대화 장면 등을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세밀하게 관찰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어떻게 돈을 벌어 가정살림도 꾸리고 자녀 학비도 대고 하시는지 생각하면서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대강 보지 말고 자세히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그래야 좋은 글이 나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옛 풍경이 되고 말았지만 제가 사는 순천에는 아직도 닷새만에 한 번씩 열리는 오일장이 두 곳이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 재래시장을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재래시장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상설시장을 선택했습니다.

3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번잡한 시장 통로에 풀어놓으니 처음에는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손에 공책이나 수첩을 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슬렁거리다 못해 수상쩍은 눈길을 자꾸만 던지는 아이들이 거북하고 못마땅한지 곱지 않은 눈길을 던지는 분들도 더러 계셨습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바지에서 방귀가 새어나가듯 적당한 간격으로 흩어져 상인들에게 큰 방해거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가방 속에서 슬그머니 사진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저는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에서 있었던 일


a 시장에서

시장에서 ⓒ 안준철

나는 시장 한가운데서 할머니를 보았는데 그 할머니를 몇 분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땅 속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듯 화끈거리는 얼굴로 "멀라꼬 보노?"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났지만 계속 보았다. 할머니는 나를 쳐다보며 "가라 여기 있으면 몬씬다.(못 쓴다)"하셨다. 물러서려는데 "빨랑 끄지라(꺼지라)" 고 할머니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나는 멀리서 보니까 그 주위 할머니께서 그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저 할망구는 성격이 좀 오늘따라 더 안 좋지 예?" 나는 할머니들끼리 조용히 소근거리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 할머니한테만 손님이 안 오신다. 성격이 고약해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 내가 끝내려고 할 때 그 무뚝뚝한 표정의 할머니가 이 빠진 웃음으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 할머니도 한 명의 손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 5학년 학생 작품


과일 가게 아주머니

a 시장에서

시장에서 ⓒ 안준철

밀짚모자 쓴 아주머니가
약국 앞에서
여러 가지 과일을 파네.

손님이 안 오니
책을 읽고 있네.

손님 한 명 와서
복숭아만 사 가고
다른 과일은 사주지 않네.

힘들어 보이고
내가 부끄러워요.

과일들도 자기를
데려가주라는 눈빛이네.

내가 베짱이 같네.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아야겠네.
-5학년 학생 작품

나의 시장 체험

a 시장에서

시장에서 ⓒ 안준철

오늘 선생님께서 동부상설 시장을 간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크림도 바르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우린 짝을 지어 동부상설 시장으로 갔다. 아이들과 그곳에서 퍼져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난 적당한 곳이 없어 계속 끝으로, 구석으로 갔다.

내 눈에 띈 할머니가 계셨다. 흰머리에 파마를 하신 할머니였다. 난 그 할머니를 지켜보기로 하고, 옆 건물에 기대서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5분쯤 지나도 손님은 없었다. 나는 계속 한 자리에 있기 지루하여 자리를 조금 옮겼다. 할머니께서는 이제 사람들에게 하나만 사달라며 외치기 시작했다.

더운 날씨에 그러고 계시는 할머니가 안타까워 보였다. 난 기다리다 지쳐 계단에 앉았다. 할머니께서도 포기한 듯 말을 멈추시고 그저 앉아 계셨다. 그렇게 10분쯤 지났다. 한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이거 얼마예요?"하자 할머니는 "이건 두 마리에 5000원"한다. 아주머니는 "그래요? 그럼 그거 네 마리 주세요" 라고 했다. "이것도 사봐. 맛있어" 하지만 그냥 가버리는 아주머니.

할머니가 웃으시며 돈을 넣으시는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이런 것을 해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이런 행상을 하시는 할머니께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시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도 돈 버느라 힘드실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6학년 학생 작품


a 내 글솜씨를 보세요!

내 글솜씨를 보세요! ⓒ 안준철

도서관에서 20일간 글쓰기 지도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은 20일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저는 글쓰기 교실이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또한, 글을 세련되게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아이들이 이기적인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우리 나라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을 준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글쓰기 교실에 보내는 것도 먼 미래의 대학입학을 염두에 두고 논술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부모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모의 일방적인 생각이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불행이고 아픔인지 모르기에 그러는 것이지요.

사람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 고통의 분량 때문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강요된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시간도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입시교육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불행한 것은 공부의 양이 많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a 마지막 날 가진 작품 전시회

마지막 날 가진 작품 전시회 ⓒ 안준철

시장 체험을 끝으로 20일 동안의 글쓰기 교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아이들이 쓴 소감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저에게 주는 편지글 형식으로 쓰라고 한 뒤에 딱 5분 시간을 주었는데도 제법 길게 쓴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마치 저를 타이르듯이 따끔한 충고를 해준 아이도 있었습니다.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조용한 한 아이여서 내심 놀라움이 컸습니다.

제가 35명의 아이들을 한 묶음으로 대상화하여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저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조금은 시건방진 제자를 둔 스승의 심정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저를 더 많이 기쁘게 한 것은 저로 인해 행복했노라고, 잊지 말아달라고 뜨겁디 뜨거운 사랑의 편지를 써준 아이들이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칭찬에 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봅니다. 그리고 아이들 말대로 제가 심각한 왕자병에 걸린 건지도 모르지요.

선생님, 거의 한 달 동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해요. 첫날엔 오지 못했지만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참 즐거울 것 같았어요. 근데 지금도 즐겁고 행복해요. 여기 올 때마다 즐거웠어요. 글을 쓰면서 웃고 재밌어서 즐거웠어요. 시장에 가서 저랑 사진 찍은 것이 추억이 될 거예요. 선생님, 절 잊지 마세요. 그 사진을 잘 모르겠으면 초록색 가방을 메고 연두색 바지랑 빨강색 조그마한 옆으로 메는 가방을 메고 머리를 올렸어요.(…)

늘 부족하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합니다. 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도 그런 행복을 꿈꾸며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하고, 신나게 놀기도 하면서 무럭무럭 커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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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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