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128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8.30 10:10수정 2004.08.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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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도 안개는 자꾸만 키를 높였고 그 안개들이 뭉게구름처럼 뭉쳐져 군사들 쪽으로 흘러오기도 했다. 군주가 시간을 끄는 이유도 그 안개 때문이었다. 안개가 더 짙어져 적들이 안개에 정신이 팔리거나 거기에 휩싸이면 그때 급습할 작정이었다.

안개가 강쪽 군사들을 3분의 1쯤 감쌌을 때 마침내 적들이 출격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마차부터 굴리며 그렇게 돌진해왔다.


"좌우로 분산!"

적들이 속력을 내기 시작한 순간 강 장수가 소리쳤다. 모든 아군들은 일사분란하게 좌우로 갈라섰다. 그러자 적들이 달려오는 그 앞 지대가 일시에 비어졌다. 적군들은 썰물처럼 비어진 빈 공간으로 뛰어든 셈이었다. 비로소 함정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만약 멈춘다면 그 순간 공격하고 들 것이다.

군주는 힘껏 달리면서 이 지대만 벗어나자고 생각했다. 군사들이 없는 벌판에만 도착하면 나름으로 조치를 취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침략자들은 그런 기회마저도 주지 않았다. 그 순간 강 장수가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공격!"

강 장수의 명령 소리에 아군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동시에 창과 화살을 날렸다. 적들의 마차가 곤두박질치거나 부서져나갔다. 아군은 재빨리 그 앞과 옆을 가로막으며 접근 공격을 했고, 호기롭게 달려오던 창기병과 화살부대는 대적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아군의 창날에 그대로 고꾸라져 나갔다.


기막힌 전술이었다. 더욱이 전방에 배치했던 산병들마저도 적시에 나서 후진 대열의 허리를 도막도막 잘랐고 산병들은 또 잘려나간 대열을 뱀처럼 감고 조이면서 도륙을 내고 있었다.

군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건 완전한 패배였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호위병마저 몇 명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목숨이라도 보전해야할 다급한 상황이었다.


군주는 팔을 번쩍 쳐들고 강을 향해 큰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곧 안개가 피어났다. 그 안개가 점점 두께를 더하면서 몰려오자 적군들도 당황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간신히 길이 열렸다. 이제 강을 건너 사라지는 길밖에 없다. 군주의 안개가 강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때 에인이 이 안개의 움직임을 보았다. 뒤에 서서 정황만 살피던 중 안개의 조화를 보고, 난국에 빠진 군주가 그 안개로 은폐해 도주할 작정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그건 아니 될 일이었다. 웬만하면 강 장수에게 모두 맡길 참이었으나 그 괘씸한 군주의 도주만은 방관할 수가 없었다.

에인은 지휘 칼을 뽑아 높이 쳐들고 신께 간원했다.

"천신이여! 안개를 쓸어주소서! 그리하여 제 칼이 정확하게 군주의 목을 날리게 해주소서!"

벌써 안개에 쌓인 군주 무리가 강에 닿아 있었다. 아군은 안개에 묻혀 허우적이고 있는 사이 군주는 물속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이려!"
에인이 곧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의 앞을 가로막은 안개가 쫙 밀려나면서 길을 열어주었다. 에인의 말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며 칼을 휘두르는 순간 뭔가가 철퍽, 하고 강물에 떨어졌다. 군주의 목이었다. 그때 안개가 싹 걷히고 달빛이 뛰어내려 강을 발가벗겼다. 목 없이 홀로 선 군주의 육신이 드러났고 그 뒤로 놀란 호위병들이 얼어붙은 서 있었다. 강 장수가 급히 다가들며 말했다.

"적의 목을 전리품으로 건져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버려두시오. 그의 몸이 저기 있지 않소. 그 머리는 이 강의 신에게 주시오. 그래야 강의 신도 고이 떠날 것이 아니겠오."

강 장수는 부하들에게 '호위병들은 죽이고 나귀는 끌어올릴 것이며 군주의 몸을 잘 보존하라'고 지시했다.
어느새 안개는 말끔히 걷혀 있었다. 천체선인의 말처럼 그 안개는 짧게 머물다 또 그렇게 떠난 것이었다. 그때 우뢰와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이겼다! 이겼다."

군사들은 창끝으로 땅거죽을 때렸고 그 울림은 하도 커서 사람의 귀청은 물론 강도 도시도 한꺼번에 날려버릴 듯했다. 강 장수가 그들 앞으로 말을 몰아가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이제 도시로 들어가서 성을 접수한다!"
군사들은 와아! 소리를 지르면서 뛰기 시작했다.

은 장수 부대는 도심지 초입 나루 앞에 집결해서 강 장수 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말똥을 쓸 여우도 없이 후원 차 나온 주민들과 접전을 치렀고 거기서 도 쌍방 수백의 사상자가 나긴 했지만 결국은 제압하고 이렇게 본진 군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만치서 군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군이었다. 그는 부하에게 나직이 지시를 내렸다.

"그 말똥뭉치는 지금 전부 강에 버려라."

그 말똥은 라라크의 과거와 함께 흘러갈 것이고 그 위로 새 강물이 새 역사로 흘러와 온 강을 채워줄 것이다. 그는 아군들 쪽으로 먼저 달려가 에인과 강 장수를 맞았다. 강 장수가 말했다.

"은 장수, 저 뒤 마차에 군주의 몸뚱이가 실려 오오. 그 몸뚱이를 도시 정 가운데 세워둔 뒤 성으로 오시오. 우린 먼저 가서 성을 접수하겠소."
"알겠습니다."

에인과 강 장수는 기병들만 이끌고 곧 성 쪽으로 달려갔다. 은 장수는 마차에 실려온 군주의 시신을 확인한 후 보병들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도시는 그날 밤 자정에야 완전히 접수되었다. 몇몇 저항세력까지 진압한 보병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가게와 주택을 약탈했다. 술집의 술은 있는 대로 다 마셨고 가축은 보이는 족족 죽여 버렸다. 처음으로 허용된 약탈이요, 만취였다.

여성강간만은 엄격히 금지되었음에도 만취한 병사들은 가정집으로 치고 들어가 부녀자를 강간했고, 숨어 있던 아이들이 울면 군사들은 그 아이들마저도 창으로 찔러버렸다. 하루 동안의 패전과 승전, 그 극과 극을 왕래했던지라 그들은 모두 그렇게 미쳐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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