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당
여기 한 여자아이가 있다. 나이는 만 19세. 이름은 유리. 현재 수능시험을 마친 재수생 신분이다.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세상이 꺼질 듯 한숨만 쉬고 있고, 엄마는 그런 '대책 없는' 아버지를 들볶기에 여념이 없다. 부모는 물론 세상도 열 아홉 소녀의 아픔과 혼란스런 감정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연히 찾아간 수상스런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유리. 그러나, 이미 미쳐버린 세상은 '예쁘장하면서도 한없이 약한' 어린 여자아이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국은 삶과 자신 모두를 포기하고 음산한 색깔의 카펫이 깔린 가게 바닥에서 벌거벗은 채 포르노를 찍는 유리. 그 자신도 절망덩어리인 사진관 주인은 절정에 오른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목을 조른다. 유리는 포르노를 넘어서는 '스너프 필름'(실제의 강간과 살인을 담아낸 영상물)의 촬영까지 암묵적으로 허락한 것일까?
전직 아나운서 출신의 작가 고은주(37)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세상풍경은 참혹하고, 메마르고, 괴기스럽다. <칵테일 슈가>(문이당)라는 달콤한 소설집 제목과는 전혀 딴 판이다. 비단 '유리'만이 아니다. 표제작인 '칵테일 슈가'와 '너의 목소리' '잠들고 싶다' 등의 작품에서도 악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러고도 너희 인간들이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래"라는 음울한 질문.
'유리'의 후속편 혹은, 관련작으로 읽히는 '너, 유리'는 이미 세상사 절망과 황폐를 몸에 익힌 성숙한 소녀를 바라보는 '미성숙한' 어른의 시각이 담겨있다. 유리는 왜 지레짐작 세계와의 불화를 작심한 것일까? 질문은 이어진다. 고은주는 왜 이 땅 어두운 곳으로만 촉수를 뻗는 것일까? "사랑의 부재는 모든 것의 부재"라는 짐 모리슨의 전언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우울증 환자와 염세주의자들은 피해가기를.
'불행했던 사회주의자'가 어디 한 명뿐일까?
-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
▲창비
"지나치게 정부 편향적이다" "그렇지 않다"라는 시민운동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창작과비평> 가을호가 발빠르게 이에 대한 해법 찾기에 나섰다. <창작과비평> 가을호는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을 특집으로 마련해 논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분석하고, 향후를 전망하고 있다.
문학관련 수록작 중에서는 성석제의 단편 '읽어버린 인간'이 독자들로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을 듯하다. 일제시대와 해방공간을 거쳐 2004년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의 폐해를 한 평범했던 사내의 생애를 통해 복원해낸 수작(秀作)이다.
일부 평론가들과 동료작가들로부터 "(그의 소설은)재미는 있으나, 재미밖에 없다"라는 묘한(?) 평가를 받아온 성석제. '잃어버린 인간'은 그런 풍문을 잠재우는 효과까지 가져오지 않을까 싶다. 자칫 딱딱하거나 계몽주의로 흐르기 쉬운 식상한 소재지만, 성석제는 특유의 '날카로운 만담체'로 이를 요리해 독자들의 밥상에 먹음직스럽게 올려준다.
공포와 변절의 한국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것이 어찌 작가 이선대의 재당숙인 '이봉한'뿐일까? 그런 까닭에 소설 말미 이선대의 울음이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이 한 편만으로도 <창작과비평> 가을호는 제값을 하고 있다.
스물 네 살 신예의 '언어조탁력'...놀랍다
-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
▲문학동네
출간 10년, 지령 40호를 맞은 <문학동네>. 이번 가을호에는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 각 부문 수상자가 발표됐다. "90년대 이후 한국문단을 횡행하는 출판상업주의와 상업소설의 교두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그간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에 박차를 가한 현업문인들의 '문학적 성과'마저 마냥 폄하할 수는 없을 터.
기자는 소설 부문 당선자인 스물 네 살 신예 김유진과 그녀의 작품 '늑대의 문장'에 주목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폭사(暴死)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가둔 섬을 씨줄과 날줄 삼아, 도대체 희망이라고는 없는 21세기와 동정과 연민만으로는 구해낼 수 없는 '지금 이곳'의 참담을 직조해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단 몇 줄의 묘사만으로 전달하는 '동물적' 엄마와 '식물적' 이모의 이미지. 거기에 덧붙여 늑대화(化) 돼 가는 개들과 더불어 미쳐 가는 동네사람들의 모습을 서술하는 대목은 갓 스물을 넘긴 이 신인에게서 천재의 냄새를 맡게 한다. '경험축적'이라는 틀을 가벼이 넘어버리는 놀라운 언어조탁력. 이건 생래적인 것일까? 지난한 훈련을 통해 이른 경지일까?
이 신예를 심사한 선배 소설가와 평론가들은 '감각에 따르지 못하는 현실인식' 따위를 아쉬움으로 운운했지만, 천만에. 그 나이에 '감각'과 '현실인식'을 다 가지라고 하는 것은 절에 처음 간 세 살 아이에게 삼십 년 면벽(面壁)수도한 스님처럼 독경(讀經)하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김유진의 문학적 미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선배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시인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칠레가 부럽다
- 계간 <세계의문학> 가을호
▲민음사
갓 수립된 스페인공화정과 프랑코 왕당파의 싸움인 동시에, 전세계 진보 지식인과 보수주의자들의 싸움이기도 했던 1936년 스페인내전. 그 전쟁은 당시 스페인에 와있던 칠레 출신 한 젊은 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낭만주의에서 민중주의로의 전환. 그는 사후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칠레 아니, 전세계 시 애호가들의 추앙을 받는 파블로 네루다.
올해는 "내 혈관으로, 내 입으로 오라/내 말과 피를 통해 말하라"며 열에 들뜬 음성으로 칠레의 광산노동자와 농민의 항쟁을 독려했던 파블로 네루다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해다. 칠레 현지에서는 다양하고도 풍성한 기념행사를 준비해 이 '자랑스런 시인'을 추모하고 있다. 중남미문학 연구자인 우석균씨가 그 현장을 둘러보고 남긴 기록이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실렸다.
'나는 오늘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연애시'에서부터 1980년대 한국 민중시의 정점이라 부를만한 김남주(94년 사망) 시인에게 영향을 미친 '선동시'까지 네루다 문학의 폭은 넓다. 하지만, 그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칠레 국민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경계도 없다. '시인'이란 단어가 조롱과 은근한 비아냥의 대상으로 전락한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같은 책에 실린 문화평론가 김성기의 '[특별기획]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는 최근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맞물려 읽는 맛과 의미가 배가된다.
| | 한 줄 이상의 의미로 읽는 신간들 | | | 외국 거장들의 작품 다수 출간돼 | | | | 스티븐 비진체이의 <연상의 여인에 대한 찬양>(해냄)
소년 안드라스가 '그녀들'로부터 배운 건 무엇이었을까? '좋은 성장소설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소설. 누이의 베개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본 소년기를 겪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 전세계 400만의 독자가 이미 맛본 비진체이 문장의 맛을 한국의 독자들도 접하게 됐다. 역자 윤희기의 매끄러운 번역이 읽는 맛을 더한다. 캐나다 문화평론가 노드롭 프라이는 이 작품을 "엄청난 연상과 함축을 담아낸 명쾌하고 매력적인 작품"이라 평했다.
미셀 투르니에의 <마왕과 황금별>(종문화사)
프랑스 최고 권위의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품. 게르만 신화를 토대로 매혹적인 이야기를 직조해낸 장인 투르니에의 솜씨가 맵차다.
아리엘 도르프만 장편 <체 게바라의 빙산>(창비)
피 뜨거운 남미의 혁명전통이 아닌 향락과 소비의 미국문화 속에서 성장한 칠레의 청년. 그는 전통과 역사가 주는 압박감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또한, 그 위에서 어떤 꿈을 꾸게될지.
계간 시 전문지 <시평> 가을호
계절에 걸맞게 '은빛 가을 아침'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된 의미 있는 계간지. 시인들이 직접 동료시인의 작품을 평하는 방식은 언제 봐도 이채롭다. 주간 고형렬(시인)은 수록작 중 몽골 시인 야워홀랑의 시를 '강추'했다. | | | | |
칵테일 슈가
고은주 지음,
문이당,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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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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