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야 원, 아닌 밤중에 여우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혼례라니? 그것도 여 소저와?‘
의성장에는 빈방이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깊은 밤이지만 자신의 처소로 되돌아온 이회옥은 팔베개를 한 채 골똘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제법 얼큰했던 취기는 사면호협과 대화하는 동안 몽땅 깼기에 정신은 더 없이 맑았다.
어린 시절 단 두 번의 만남, 그때 한 사람은 적선하듯 은자를 베풀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은자를 뭉그러뜨려 주사위로 만든 뒤 건넨 인연밖에 없다. 그런데 느닷없이 혼례를 올리라 하니 무엇에 홀린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호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지만 성장한 여옥혜는 천하절색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다. 외모만으로도 호감을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거기에 부드러운 품성과 다정다감한 성격, 그리고 환히 웃을 줄 아는 여인이기에 이 세상 어떤 사내든 매혹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곧바로 혼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가 하나로 결합되려면 끈끈한 정이라든지, 뜨거운 사랑 같은 것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그렇기에 과분하게도 저쪽에서 먼저 제의했건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중에라도 혼례를 올리게 되면 조연희와 홍여진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둘 중 조금 더 마음에 끌리는 쪽은 조연희쪽이었다.
선무분타에서 그녀의 매혹적인 나신을 본 때문만은 아니다. 모친인 곽영아가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도 아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냈던 추억과 그때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그때 쌓았던 정 때문이다.
빙화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그녀는 원수의 동생이다. 따라서 운명적인 결합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노골적으로 다가서는 그녀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 얼마나 애를 썼던가!
‘후후! 나 같은 놈을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여옥혜가 자신을 연모하였다는 말에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이회옥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때였다! 누군가의 신형이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음산하면서도 나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꼼짝 마라!”
“허억! 누, 누구…?”
음성에 담긴 살벌함에 화들짝 놀라 일어서려던 이회옥은 흠칫하며 멈췄다.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처럼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오도록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면 상대가 예사롭지 않은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일단은 상대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기에 멈춘 것이다.
“반항하거나 도주하려 하면 목이 달아날 것이니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
“누, 누구냐고 물었다. 이곳이 어디며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크크! 알지. 그것도 아주 잘 알지. 마선봉신 나으리.”
“그, 그럼 알면서도…? 윽!”
말을 이으려던 이회옥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혈과 아혈이 동시에 제압되었기 때문이다.
* * *
“불어라! 왜 그곳까지 땅굴을 파놓았는지를…”
“으으윽! 으으으윽!”
“흥! 이 정도로 엄살을…? 어림도 없다. 오냐 오냐 하면 기어오르고 귀여워하면 수염을 뽑는다더니 네놈이 딱 그짝이로구나. 여봐라! 무엇 하느냐? 어서 주리를 틀어라!”
“존명!”
“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끄응!“
“소성주, 혼절하였습니다.”
“물을 뿌리고 계속해서 주리를 틀어라.”
“존명!”
촤아아악―!
“아아악! 아아아아악!”
“이놈, 어서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어서 말해.”
“으으으…! 구, 궁금증 때문에…”
“호오! 궁금증 때문에 그랬다? 단순히 궁금증 때문에 그렇게 긴 땅굴을 파놓았단 말이지? 너 같으면 믿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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