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9일 오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가보안법을 지켜내겠다"고 밝혔다.오마이뉴스 이종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에 맞서 북한군의 전력 증강이나 휴전선 전진배치와 같은 억지논리로 다시 국민들을 속이기는 어려울테니 국가보안법을 옹호하려면 한층 설득력있는 논거가 필요하겠다. 그런데 기껏 반복하는 논리가 북한 노동당 규약이나 형법의 일부 조항이라니 한심하다. 호랑이가 온대도 겁나지 않는 판에 고양이라니.
국가보안법을 옹호하려면 정치발전이나 경제발전, 혹은 인권과 복지에 크게 보탬을 주었다는 긍정적인 근거를 제시하면 좋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국가보안법 없이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거나 어렵게 지켜온 이 나라를 지탱하기 어렵다는 근거라도 제시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훌륭한 법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필요악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자는 것이다.
유성환 의원의 통일국시 발언
그러나 옹호론자들은 최소한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국가보안법이 정권안보와 독재를 위한 악법이라는 주장에도 반론하지 못하고 있다. 또 국가보안법이 국회 밖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압살하고 국회 안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침해함으로 민주화와 정치발전을 제약한 반민주 악법이라는 주장에도 침묵하고 있다. 86년 유성환 의원의 통일국시 발언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기억하자.
우리 사회는 진보와 친북을 동일시하고 민주화와 반국가를 동일시하는 국가보안법의 편협한 논리 때문에 진보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 언론출판활동에 대한 국가보안법의 탄압 때문에 국민들의 민주의식 형성은 크게 왜곡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행사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단지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국가보안법은 얼마든지 반사회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 있다. ‘막걸리보안법’은 그 좋은 사례이다.
국가보안법은 해방정국의 긴박했던 정치상황의 산물이다. 미소냉전을 배경으로 남북이 분단되고 좌우파간 이념대결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특히 좌파의 공세에 대한 우파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친일반공우파의 생존전략으로 등장했다. 구체적으로 제주도 4·3사건과 여순사건이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되었다. 해방 직후 통일정부 수립이 좌절되고 분단이 노골화되는 특수한 상황에서 임시법의 성격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태어난지 반세기도 더 지난 지금은 미-소냉전도 없고, 남북대결과 한국전쟁도 없고, 극단적인 이념대결도 없는 상태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을 추구했던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으로 체제유지를 걱정하는 형편인데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북을 왕래하고 금강산관광사업과 개성공단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이다. 우리의 경제상황이나 국민들의 의식 수준도 예전같지 않다. 상황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외국의 사례에서 우파가 우파다운 것은 민족적이기 때문이고 국민들이 우파를 지지하는 이유는 우파의 이념적 포용력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서 우파가 친일과 반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더군다나 냉전이 탈냉전으로 바뀌고 분단과 대립에서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상전벽해의 상황에서 낡은 국가보안법에만 매달리는 것은 마녀사냥 수준의 정신병리적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홉킨스의 딜레마와 마녀사냥법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리던 17세기 중반, 영국에 홉킨스라는 유명한 마녀사냥꾼이 있었다. ‘마녀사냥꾼 총독’이라 불렸던 그는 두 가지 마녀판별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기도를 하거나 교리를 외게 하는 것이다. 마녀로 몰린 여자가 기도를 하다가 한 단어라도 빼먹거나 발음을 잘못하면 마녀로 판명되었다. 마녀로 몰리면 산 채로 화형당하는 상황에서 공포에 질린 여자들이 실수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른 방법은 더욱 악랄한데, 용의자의 팔다리를 묶고 담요에 둘둘 말아 연못이나 강에 던졌다. 마녀는 물에 가라앉지 않고 뜬다는 믿음에 따라 시험을 하는 것이다. 시험 결과 용의자가 물에 뜨면 마녀라는 확고한 증거가 되므로 화형에 처했고, 가라앉아 죽으면 가족에게 마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위로하면 그만인 것이다. 결국, 마녀로 지목되기만 하면 마녀로 판명되든 아니든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홉킨스의 딜레마’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홉킨스의 딜레마’가 홉킨스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무분별한 마녀사냥으로 홉킨스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점차 그의 사기술이 드러나면서 그가 악마의 도움으로 마녀를 찾아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비판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홉킨스가 즐겨 사용했던 마녀판별법을 홉킨스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난 군중들은 홉킨스를 묶어 담요에 말아 연못에 던졌고,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마녀사냥에 사용된 홉킨스의 판별법이 바다를 건너와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에도 그대로 활용되었던 모양이다. 어느날 누군가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반국가행위를 한 것으로 지목되면 그가 반국가행위를 했든 하지 않았든 사실 여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지목하고, 그 법에 따라 탄압하고,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법 집행의 타당성 여부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홉킨스가 자기 딜레마에 빠졌던 것처럼 국가보안법 역시 그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옹호론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동의한다면 자신의 논리적 기반과 모순될 것이고, 폐지에 반대하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보안법을 자신과 일체화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착오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논리와 모순되지도 않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면 규칙도 바뀐다. 우리의 경제규모와 경제상황에 비추어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필요한지, 자본가나 기업경영자들이 국가보안법에 의존해서 이윤을 창출하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국민 대다수가 대학교육을 받는 교육강국에서 국민들이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지도 의문스럽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고도로 성숙한 이 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은 국가신용도를 떨어뜨리고 국민들을 망신시키는 노예적 습속일 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국가보안법은 품격있는 아파트 안에 자리잡은 푸세식 화장실이거나, 고급 승용차에 장착된 '구루마'의 역할이 아닌가? 130년전 독일에서 비스마르크가 우리 국가보안법과 같은 ‘반사회주의자법’을 만들었다가 스스로 폐기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유전한다”고 한 다음부터 변증법이 유행하게 되었다. 변증법의 원리는 낡은 것은 반드시 퇴출된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낡은 것을 철회하지 않으면 다른 힘의 작용에 의해 가혹하게 철거되는 것이 역사의 원리이다. 국가보안법도 역사의 한 시점에서 불가피했다고 강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지금은 물러나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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