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국민의 명예를 침해했다"

육군본부 명예권 침해사건 조사 수기

등록 2004.09.22 08:46수정 2004.09.2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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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끝났다. 조사기간 동안 내 체중을 5kg이나 앗아간 육군본부의 순직처리 관련 사건을 털었다. 결과는 통지업무 책임자 징계 및 신속한 유족 통지 이행, 피해자 법률구조 요청, 해·공군 병·변사자 사망구분 전면 재심사 권고였다. 이로써 군에 재직하다가 병·변사로 처리되었다가 순직·전사로 변경되었음에도 이 사실을 몰라 보훈 혜택을 받지 못했던 군 사망자의 유가족들에게 늦게나마 희망을 만들어주게 됐다.

두 달만에 받은 국방부 자료 내용 '부실'

순직처리 사건의 진정서를 처음 접했을 때는 막막했다. 진정내용이 명확하지 않았고 기초적인 자료도 없었다. 그러니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다. 자세한 진정 이유와 취지를 알고자 해도 진정서에는 진정인의 연락처가 적혀 있지 않았다.

막막한 느낌은 피진정인인 육군본부를 조사하면서 조금씩 걷혔다. 처음엔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자료요청부터 시작했다. 어렵게 육군본부 인사처리과 담당자와 통화가 돼, 사건의 경위와 관련 규정 및 자료 등을 요청했다.

그런데 몇 차례 독촉해 두 달만에 받아 본 자료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사건의 경위 등은 진술돼 있지 않았다. 국방부 훈령과 진정인의 민원서류 등 몇 개뿐이었다. 이 정도 자료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없었다. 전화나 서면을 통한 조사 역시 더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실지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지난 3월, 충남 계룡시에 있는 육군본부를 찾았다. 그러나 조사에 대한 육군본부의 준비는 미약했다. 공문을 보냈는데도 보안조치가 돼 있지 않아, 민원실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육군본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사를 할 수 있는 공간 제공도 이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담당자의 책상 옆에 동그란 보조의자를 놓고 조사를 시작했다(다행히 2차 실지조사 때는 조사실이 마련됐고, 관련 자료도 미리 준비돼 있었다). 곧바로 사건의 경위 및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당시 실무자는 육군본부에서 유족들에게 순직처리 내용을 통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현행 법률에 의하면 국가유공자는 국가보훈처장이 보훈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결정한다. 그러나 심사과정에서 각 군에서 확인한 사망원인이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유족에 대한 보훈 혜택은 유족이 등록신청한 달로부터 발생한다. 사망 당시로 소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유족에 대한 통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보훈 혜택의 여부를 떠나서라도 유족은 내 가족이 어떻게 사망한 것인지를 당연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육군본부는 1995년부터 이듬해까지 창군 이래로 발생한 병·변사자 4만5000여 명의 사망구분에 대해 재심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이번 진정 사건 피해자의 남편을 포함한 약 1만명을 전사·순직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유족에게 그 결과를 통지하지 못한 경우가 7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담당 실무자는 자료가 부실하여 유족의 소재 파악이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육군본부가 유족의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취한 실질적인 조치는 대부분 1999년 6월 KBS '추적60분'에서 촬영협조를 요청한 이후에 이뤄졌다. 그러나 그 역시 미흡해 보였다. 언론보도 전에 취한 조치는 일부에 대해 내무부에 소재 파악 요청을 하여 거부된 이후 국립 현충원의 묘비를 병·변사에서 전사·순직으로 변경한 것뿐이었다.


언론에서 문제제기를 한 당시에는 일정한 조치를 취했으나 이번 조사 당시엔 유족이 민원을 제기하면 확인해 줄 뿐이었다. 적극적인 홍보도 없었는데 유족이 관련 사실을 알고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통지 대상자가 약 1만명에 달하는데도 원사 1명과 사병 1명이 민원처리와 함께 이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단지 실무자의 책임이 아니라 육군 상층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지 않았나 싶었다.

더욱이 납득되지 않은 것은 유족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답변이었다. 7000여 명의 사망자에 대한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육군본부가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망자의 본적지로 확인하면 유족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겠다 싶어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우선 육군본부에서 제출한 대상자의 명부에서 16명을 임의로 추출했다. 처음엔 행정자치부 주민과에 협조요청을 했다. 그러나 소관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어 15개 구청과 면사무소에 일일이 전화를 걸고 공문을 발송해 사망자의 제적 등본 제출과 유족의 소재 파악을 위해 협조를 구했다. 그 결과 16명 중 12명의 유족 소재가 파악되었다. 소재 파악이 되지 않은 4명 가운데 3명은 육군본부에서 대상자 명부에 본적지를 잘못 기재한 것이었다. 결국 사망자의 본적지가 정확하다면, 그 본적지로 의뢰하면 상당수의 유족 소재가 파악 가능한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이 결과를 육군본부에도 알려 주었다. 그후 육군본부는 지난 5월 말경에 시군 단위로 대상자 명부를 작성해 행정기관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한 달여만에 500여 명의 유족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렵다던 유족 소재 파악, 공문 한 장으로 해결

또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언론과 인터넷 등을 이용한 홍보가 부족하다는 점도 육군본부에 얘기했다. 그 결과 후 5월 중순경에 육군본부는 홈페이지에 순직, 전사자 유족을 찾는다는 공고를 게재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확인하니 새로운 공지사항들에 밀려 몇 번의 클릭을 통해 찾아들어가야 했다. 역시 이런 문제점을 다시 육군본부에 지적했다. 결국 육군본부 홈페이지를 열면 첫 화면에 팝업창이 떠서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바뀌었다.

6월 14일 전원위원회에 이 사건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이날 심의과정에서 육군본부 외에 해·공군의 경우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직권조사를 결정했다.

해·공군에 대한 직권조사 실시

다시 해군과 공군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작했고 육군본부와 달리 병·변사자에 대해 직권으로 재심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민원제기된 인원에 대해 재심사한 결과 해군과 공군에서도 순직으로 변경한 사례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한편 이에 대해 해·공군본부는 국방부훈령인 전공사상자처리규정상 직권으로 재심사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존에 제기된 민원의 처리 결과 해군의 54%, 육군의 21%에 해당하는 인원의 사망 구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상당수 순직 대상자들이 병·변사자로 잘못 처리되었을 가능성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결말지으면서 해·공군 창군 이후 병·변사자 처리된 자의 사망 구분에 대해 전면 재심사할 것을 국방부장관에게 권고하는 내용도 추가하게 되었다.

국가인권위 권고가 발표되고 난 후 육군본부 인사처리과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했다. 담당자는 징계 권고가 있었지만 국가인권위의 결정으로 상층부에서 관심을 가져 유족 통지 업무가 나아질 것 같아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징계 권고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고, 보람도 느꼈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이번 사안이 조사대상이 되는지 여부였다. 유족이 보훈 혜택을 요구하는 진정이므로 재산권 관련 문제로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의하면 재산권과 관련한 진정은 국가인권위의 조사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국민의 권리나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국민은 알 권리가 있기 때문에 국가는 이를 알릴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진정 원인은 육군본부의 알 권리 및 명예권 침해 행위이고, 진정취지가 인권 침해로 인해 받은 손해의 배상을 원하는 것이므로 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설령 조사대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인권위에서 언론기관에 요청하여 유족들이 관련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지로 조사해 나갔다.

국가인권위의 권고 이후 국방부에서 일정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1999년 때처럼 미봉책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이 군복무중 사망한 유족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이러한 슬픔이 국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진정사건 피해자가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하여 승소한다면, 유사 소송이 봇물처럼 터질 것이 예상된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는 육군본부의 잘못된 업무 추진으로 인한 유족의 재산적·정신적 손해에 대해 보상 조치하는 등 대책이 필요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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