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조' 아메리칸 드림, '급증' 인생 역전의 꿈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14] 캘리포니아 페칭가 카지노 리조트

등록 2004.09.26 17:04수정 2004.09.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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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대선에 이어 2004 미국 대선은 양극화되고 있는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미국 사회내 블루(blue)와 레드(red)의 대립은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양극화는 정치는 물론 지역, 인종, 경제, 문화, 심지어는 스포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 원인은 묘하게도 세계화(globalization)에 있다.

세계화의 엔진이자 진원지인 미국이야말로 세계화의 영향을 가장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크게 받고 있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선거전이 예상되는 2004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사회의 양극화된 이면을 현장취재한다. 블루와 레드는 미국대선 개표 때 주별로 민주당이 이긴 지역은 블루, 공화당이 이긴 지역은 레드로 표현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필자 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흘 동안 견딘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조금 망가진들 지금까지 버틴 게 어딘가. 내려가자.

카지노 리조트 호텔에서 나흘 동안 갇혀 있다면 아무리 도인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하물며 사행심리가 '정상적'으로 있는 사람이 어떻게 슬롯 머신을 돌 보듯 할 수 있단 말인가. 매끼 식사하러 내려갈 때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서 요란법석을 떨고 있는데 더 이상 모른 체 하는 것은 '정상인'의 도리가 아니다.

5층에 있는 방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어쩜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르지"하는 얄팍한 생각도 들었다. 월요일 새벽 4시다. 출근을 생각하면 도박장에 남아있을 수 없는 시각이다. 그 시간까지 손님들은 대부분 돈을 털리고 갔을 테고 한껏 배불러 여유가 생긴 기계가 조금은 관대해져서 돈을 풀 시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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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주 테메큘라(Temecula)시에 있는 페칭가(Pechanga) 카지노 리조트. 큰 도시인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의 중간에 위치, 양쪽에서 손님들을 끌어들여서 라스베이거스 못지 않게 떼돈을 버는 카지노로 알려져 있다. 카지노는 1층에 있고 2층부터는 호텔이다. 필자는 테메큘라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이 호텔에서 숙박하도록 지정해주는 바람에 일이 끝날 때까지 팔자에 없는 카지노에 머무르고 있는 중.

한국에서는 카지노가 잠입취재의 대상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가면 된다. 그래도 카지노 하면 외국인이나 최상류층의 오락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는 듯한 느낌으로 카지노에 입장했다.

월요일 새벽의 카지노

예상은 빗나갔다. 건물 밖에서는 동이 터올 그 시각에 사람들이 여전히 북적대고 있다. 노란 불빛 아래서 밤을 꼬박 샌 듯 눈빛이 초췌하고 얼굴은 기름기로 번들거린다.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진검 승부사'의 면모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후는 그렇게 장렬하지 않고 현실로의 고단한 복귀일 뿐일 텐데.

대형 홀 하나가 축구장 만하다. 친근한 얼굴들이 많다. 아시아인들이 점령한 미국 사회가 있다고 하면 그곳은 카지노다. 캘리포니아의 주도인 새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나오는 신문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에 따르면 아시아인의 비율이 9%인 새크라멘토 일대 도박장에서 테이블 게임 손님의 60~70%, 슬롯 머신 손님 20~25%가 아시안 아메리칸이다.

미국에서 최근 인기 있는 TV프로그램인 월드 포커 투어 시리즈를 보면 결승 테이블에 진출한 사람들 중에는 꼭 아시아인들이 끼어 있다. 그 중에는 한국 사람도 안 빠진다. 그리고 여성 결승 테이블에서는 아시아 여성들끼리 맞붙은 경우도 봤다. 그래도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자랑스럽다는 느낌은 안 든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팜스 카지노(Palms Casino)에 가면 4층도 없고, 객실 번호 40번 대는 결번이라고 한다. 4자를 재수없는 숫자로 여기는 중국인들에 대한 배려라고 한다. 어릴 때 들은 중국인들의 도박벽에 대한 얘기가 떠올랐다. 자장면 집 주인과 종업원이 마작으로 붙어서 종업원이 이기는 바람에 종업원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빗자루를 쓸게 됐다는.

페칭가 카지노를 얼핏 봐도 절반 이상이 아시아인들이다. 특히 이 새벽까지도 절대 다수를 점하면서 은근과 끈기를 발휘하고 있다. 이 사람이 한국 사람인가, 중국 사람인가 헷갈린다. '중국 사람인가 보다'하는데 "패가 안 좋다. 죽어" 그런 '무지막지한' 한국말이 들려온다.

이 카지노의 내부 사정을 아는 한 인사에 따르면 페칭가 고객 중 4분의 1이 한국계라고 한다. 그것은 전날 이 호텔에 있는 동양음식점 '블레이징 누들(Blazing Noodles, 직역하면 불타는 국수)'에서 '고맙게도' 비빔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은 일이다. 일요일까지 한국음식 특선 주간이었다. 불고기, 찌개에다 심지어 회덮밥까지 선보였다. 서양 음식에 지친 혀에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비빔밥을 시켰는데 고추장 대신 초고추장이 나왔다. 한국인 종업원도 꽤 있던데 왜 이런 '반칙'을 방관하고 있는지 화가 났다.

페칭가 카지노에는 슬롯 머신이 2000대나 있고 포커나 블랙잭, 바카라 등을 할 수 있는 테이블이 125대, 거기에 별도의 지하 포커룸이 있다. 주말에는 그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댈 데가 없어서 차들이 먼저 돈을 잃고 나온 사람들을 따라 다닌다. 그 사람들이 차를 빼면 잽싸게 그 자리에 집어넣는다.

주말에는 슬롯 머신이나 테이블 역시 줄을 서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할 정도니까 인파가 최소한 3천명은 된다. 월요일 새벽 시간에도 눈대중으로 1천명 가량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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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칭가 카지노 리조트의 슬롯 머신 광고 사진 ⓒ 페칭가 카지노

좋은 슬롯 머신을 고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000대의 슬롯 머신이 하나의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좋은 기계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고른다. 나는 입구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 속설이 과연 있는지 모르는데 고스톱을 칠 때 항상 벽을 등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시아계가 대접 받는 사회

20달러 지폐를 집어넣었다. 한번에 걸 수 있는 돈을 하한선인 25센트로 정하니까 25센트가 1점으로 표시된다. 점수가 80점이 나온다.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알아서 회전하다 멈췄다. 사실 뭐가 좋은 건지 모르는 까막눈이다.

한번에 1점씩 까먹고 뭔가 걸리면 점수가 올라간다. 현금을 넣었는데 따는 돈을 점수로 환산하니까 돈놀이하고 있다는 실감이 안 온다. 따거나 남은 돈은 숫자로 표시돼 전표로 찾는다. 그 전표를 환전소에 가서 돈으로 바꿔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니까 돈을 걸기는 쉽게, 돈을 찾기는 불편하게 만든 구조다.

사실 도박 말고 다른 할만한 게 없었다. 호텔은 바위 산 밑에 있다. 캘리포니아라고 하지만 바다에서 32킬로미터나 떨어진 내륙이고 척박한 땅이다. 먼지가 풀풀 나는 들판에 산토끼만 무척 많다. 더워서 조깅하기도 어렵다. 차도 없었다. 호텔 안에서 할 수 있는 소일거리란 일 또는 도박뿐이었다.

물론 그 동안 일만 한 것은 아니다. 틈틈이 식후 소화의 명목으로 도박장 안을 산보하면서 곁눈질해왔다. 슬롯 머신은 사람으로 치면 참 겸손한 친구다. 돈을 잃었는데도 경광등을 울리거나 요란한 음악을 틀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준다. 반면 돈을 따면 겸손하게 조용히 돈을 집어삼킨다.

미국 카지노들은 수입의 65%를 이 단순한 슬롯 머신에서 챙긴다. 그래서 슬롯 머신을 몇 대 놓느냐가 얼마나 버느냐의 관건이다. 6월21일 캘리포니아 주에서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와 5개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이 합의한 협상안을 보고 그 규모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황금알을 낳는 슬롯 머신

인디언 부족들은 슬롯 머신을 원하는 만큼 설치하는 조건으로 10억달러(1조2000억원) 어치의 주정부의 채권을 인수하고 2000대를 초과해서 설치되는 슬롯 머신의 한 대당 매년 1만2천 달러 그리고 슬롯 머신 연간 순익의 10%를 주정부에 내기로 했다. 이 합의안에 따라 주 정부는 매년 1억5천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하니까 슬롯 머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캘리포니아 주에는 미션 인디언의 팔라족(Pala Band of Mission Indian)과 유나이티드 어번 인디언 커뮤니티(United Auburn Indian Community) 등 이번에 합의한 5개 부족 외에 45개 부족이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어서 이 부족들과도 비슷한 합의를 이끌어내면 천문학적인 세수를 올릴 수 있다.

그 세금을 내려면 슬롯 머신은 그냥 돈 먹는 기계여야 할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필자 앞에 있는 기계에서는 계속 경광등이 울렸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쳐다본다. 20달러가 200달러가 됐다. 점수로는 800점. ‘Cash Out’ 버튼을 누르니 200달러 전표가 나온다. 번 돈보다 딴 돈이 두 배만큼 달콤하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붕 뜨는 기분이다.

1시간 만에 열 배를 벌었으니 인디언 부족에게 미안하지만 손을 털고 올라가서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필자가 그렇게 단호히 방으로 올라갈 수 있다면 미국의 모든 카지노는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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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칭가 카지노 리조트의 포커룸 광고 사진 ⓒ 페칭가 카지노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스리 카드 포커(Three Card Poker)였다. 그것은 테이블에서 한다. 슬롯 머신과 테이블은 바로 붙어있지만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어 보였다. 아니 지능의 벽이 있어 보인다. 슬롯 머신이 기계가 알아서 하는 도박이라면 테이블 게임은 뭔가 머리를 굴려야 하는 도박이다. 이제 필자는 그 벽을 넘어 진정한 도박인이 되려고 한다.

그 동안 눈여겨본 바에 따르면 스리 카드 포커는 3장의 카드로 하는데 3장의 숫자가 같으면 몇 십 배를 준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보통은 에이스나 킹처럼 숫자가 높은 카드가 한 장이라도 들어오면 이긴다. 게임의 룰은 쉽지만 걸 수 있는 돈의 하한선이 5달러로 높다. 그리고 한판에 두 번 이상 베팅해야 하기 때문에 금방금방 돈이 나간다. 더구나 보통은 10달러를 걸어서 딜러보다 패가 좋으면 5달러를 받는데 지면 10달러를 다 가져가는 방식도 요상하다.

아름다운 칩 디자인

그런 불공평을 상쇄하기 위해 고객들에게 특별한 패, 예컨대 같은 숫자 3장(트리플)이라든지 같은 무늬 3장(플러시) 또는 같은 숫자 2장(페어)이 들어오면 몇 곱절 보상을 더 해주지만 그런 패들이 들어올 확률은 적다. 높은 보상에 낮은 확률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얘기 같지만 카지노에서는 그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적은 보상에 높은 확률로 자신이 이득을 보도록 해놓는다.

네 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비집고 들어갔다. 아시아인은 필자까지 3명이고 서양인이 2명이다. 여기 오는 서양인들도 행색이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딜러도 아시아계의 남자여서 마음이 푸근하다. 영어는 별로 쓸 필요가 없다. 딜러는 필자에게 자꾸 한 손으로만 카드를 보라고 주의를 준다. 도박장에서 속임수를 막기 위해 두 손을 다 쓰는 것은 금지돼 있다고 한다.

처음으로 만져보는 칩은 입에 넣고 깨물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랄까. 플라스틱인데 표면의 색깔과 무늬가 매끈하게 처리돼 있다. 화폐로 써도 될 만큼 정교하지만 단위가 커서 동전처럼 쓰다간 가산탕진하기 알맞다. 특히 도박할 때는 그렇다. 25달러짜리 칩을 동전처럼 쓰다가 거덜이 났다. 30분만에 180달러가 나갔다. '아니 이럴 수가.'

그래도 본전은 남았다. 쫀쫀하지만 20달러를 꼬불쳐 놓았다. 새벽 5시반, '잘 놀았다'면서 진짜 손을 털고 올라갈 시간이다. 근데 발길은 다시 슬롯 머신으로 간다. 20달러로 다시 200달러를 만들어 테이블로 복귀하려는, 꿈도 야무진 생각이다. 이번에는 배포가 커져서 걸 수 있는 돈의 하한선을 50센트로 정했다. 버튼을 눌렀다.

원래 캘리포니아 주에는 카지노가 없어서 도박을 하려면 모하비 사막을 넘어서 네바다 주의 라스베이거스로 가야 했으니 세상이 얼마나 편해진 건지 모르겠다. 캘리포니아 주뿐 아니다. 76년 뉴저지 주가 애틀랜틱 시티(Atlantic City)에 도박장을 낼 때까지 미국 전역에 카지노라고는 1931년에 생긴 라스베이거스밖에 없었다. 도박은 이 나라를 세운 청교도의 윤리와 어긋난다. 카지노는 오직 미국의 오지인 라스베이거스에까지 시간과 돈을 들여 갈 수 있는 사람들의 오락이었으니 여기서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카지노의 폭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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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 주 고속도로 35번 주변에 있는 레이크사이드 카지노 전경 ⓒ 홍은택

카지노가 폭증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1988년 미 의회에서 인디언 도박 허용법(Indian Gaming Regulatory Act)을 제정,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보호구역(reservation)에 도박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합법화한 것이 계기였다. 도박장 개설은 미국에 땅을 빼앗기고 알코올 중독과 범죄,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는 인디언들에 대한 일종의 시혜였다. 인디언 부족들은 도박장에서 번 돈으로 병원과 학교를 짓고 도로를 닦았다. 일부는 여기서 나온 수입으로 공장을 지어서 경제적으로 자립한 사례도 있다.

20년도 안돼 220개 부족이 28개 주에서 377개의 카지노를 운영하게 됐다. 지금도 우후죽순 전국 각지에서 생겨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만 금명간 카지노의 수가 100개소가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국인디언도박협회(National Indian Gaming Association)'는 2003년만 해도 도박으로만 157억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고 말했다. 일부 인디언 부족의 뒤에는 라스베이거스의 보이드(Boyd) 가문과 같은 도박재벌들이 있다. 이들은 인디언 부족들을 앞세워서 도박이 금지된 지역을 뚫고 들어갔다. 가난한 주들도 세수를 늘리기 위해 앞다퉈 카지노의 설립을 허가했다.

카지노와 로또는 아메리칸 드림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산업이다. 둘을 합쳐서 최소한 매출 규모가 6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600억 달러면 웬만한 국가의 국민총생산(GNP)보다 많은 액수인 동시에 미국인들이 영화와 음반, 스포츠 관람에 소비한 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액수라고 한다.

그런데 자못 파국으로 치닫는 성장이다. 카지노 설립 허가를 서두르고 있는 미 동부의 매릴랜드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두 주의 정부가 서두르는 이유는 주민들이 인근 델라웨어나 웨스트 버지니아, 뉴저지 주에 있는 카지노로 넘어가서 돈을 쓰고 오기 때문이다. 자기 주에서 돈을 쓰게 하겠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메릴랜드 주의 경우 슬롯 머신 1만5000대를 허가해주는 대신 연간 9억 달러씩, 펜실베이니아주는 3만6천대를 허가해주고 10억 달러의 세수를 거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돈을 공립학교 지원과 같은 고상한 용도로 쓰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매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는 붙어있기 때문에 다른 쪽에 카지노가 생기면 타격이 훨씬 커서 서로 먼저 카지노를 설치하려고 경쟁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회에서 반대하고 있어 주지사들의 애간장이 타고 있다.

카지노의 폐해

문제는 카지노가 생기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세수가 확대되는 이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적 타락뿐만 아니라 도박중독과 범죄, 그리고 경제적으로 파산하는 사람들이 급증한다는 것. 이들을 치료하고 지원하기 위한 예산이 카지노 세수를 상회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정부들이 밀어붙이는 것은 어차피 인근 주에서 성업하는 카지노들이 자기 주민들을 데려간다면 카지노 영업에 따른 이득은 인근 주에 다 빼앗기고 카지노 중독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자기가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주에 카지노를 만드는 게 그나마 손해를 줄이는 길이라는 논리다. 이것이 시리즈 4편에서 언급한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다. 콘서트에 가서 자기만 잘 보려고 일어서면 다른 사람도 다 일어나서 모두 다 볼 수 없게 된다는 그 현상이다.

보다 더 큰 문제는 누가 도박을 하느냐는 점이다. 미국 어딜 가도 고속도로에서 카지노 입간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대충 계산해서 차로 두세 시간 가는 거리 안에 카지노들이 분포해 있다. 월마트에 가듯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든 카지노에 갈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가난한 이들이 간다.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가서 일부는 파멸의 지름길로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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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국의 수도 탈레쿠아에 있는 키투와 카지노의 전경. 함바식당 같은 분위기다. ⓒ 홍은택

전편에 소개한 체로키국의 수도 탈레쿠아(Tahlequah)에는 키투와(Keetoowah)라는 카지노가 있는데 돈을 따 가는 게 미안한 생각이 들 만치 초라하다. 정식 건물도 아니고 공사판의 함바식당과 같은 간이건물 안에 슬롯 머신만 400대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자주 인용되는 미시시피 주립대의 스테니스 행정연구소(The John G. Stennis Institute of Government)의 96년 연구결과에 따르면 수입을 감안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수입보다 더 높은 비율의 돈을 도박에 소비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더 많이 쓴다. 카지노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이 조사에서 가구 수입이 연간 1만 달러가 안 되는 사람들은 연간 수입의 10.3%(약 1천달러)를 쓰는 반면 가구 수입이 2만에서 3만 달러인 사람들은 수입의 3.3%인 990달러, 그리고 5만 달러가 넘은 사람들은 겨우 1.3%(650달러)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 의회가 설치한 '전국도박영향조사위원회(National Gambling Impact Study Commission)'에 따르면 로또 복권의 경우도 1만 달러 미만의 소득 그룹이 어떤 그룹보다 더 많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카지노 설립 허가나 로또 발행 허가의 명분은 세수 확대로 못 사는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 건데 그 세금이 결국 못 사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인 격인데 도박의 경우 정신적 상처와 가정 파탄의 비극이 뒤따른다.

아메리칸 드림의 퇴조

이 위원회에 따르면 카지노가 급속히 팽창한 90년대 10년 동안 도박에 중독된 환자들의 숫자가 50%나 늘어났다. 이 환자들이 자살을 기도하거나 이혼하거나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은 도박하지 않는 사람의 서너 배에 달한다. 이들을 치유하거나 처벌하는데 지출되는 사회적 비용은 연구자에 따라 작게는 연간 1만4006 달러, 많게는 2만2077달러로 잡고 있다고 '도박합법화 반대 전국연합(National Coalition Against Legalized Gambling)'은 밝히고 있다.

왜 한방에 인생을 역전시키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생을 역전시키기가 갈수록 어렵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땀 흘려서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게 미국에서조차 점점 힘들어진다. 그것을 아메리칸 드림의 퇴조라고 부른다. 그러나 카지노에서 한방에 인생을 역전시키는 것은 더욱 힘들다. 필자가 그걸 체감했다.

50센트로 베팅하니 금방 숫자가 줄어든다. '아니, 기계를 바꾼 게 실수일까.' 거짓말처럼 10분도 안 돼 한번도 변변한 게 걸리지도 않고 0점이 됐다. 미련이 남아서 주머니에 남은 25센트 동전들을 털어 넣어서 버튼을 눌렀지만 변심한 애인처럼 한번도 눈길도 안 주고 돈을 다 먹어버렸다.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해 연간 1억8천만 달러의 순익을 올리는 페칭가 카지노에 고작 20여 달러를 보태주는 것으로 선방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잠은 오지 않고 카드의 숫자와 무늬가 눈에 어른거린다. 애초에 200달러를 땄을 때 일어섰더라면 남은 몇 일 동안 불타는 국수집에서 포식할 수 있었을 텐데….

바로 다음 날 호텔에 갇혀 있는 게 심심하지 않느냐며 한국인 친지 2명이 찾아왔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자연스럽게 카지노로 내려갔다. 이들은 처음부터 100달러를 칩으로 바꿨다. 필자도 따라서 100달러를 꺼냈다. 이번에는 어깨 너머로 봐온 블랙잭을 해보기로 했다. 블랙잭은 누가 더 21점이나 21점에 가까운 숫자의 조합을 만드느냐로 승부를 정하는 게임이다.

말이 필요 없다. 손바닥으로 테이블 바닥을 두 번 두드렸더니 카드를 한 장 더 준다. 카드를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으면 손바닥을 옆으로 짧게 한번 지르면 된다. 손짓만으로도 도박할 수준이 됐으니 대견하기 이를 데 없다.

한데 패가 안 좋다. 필자뿐만 아니다. 모두 다 안타까워했다. 딜러에게 패가 너무 잘 들어갔다. 돈을 딴다고 해서 자기 돈이 되는 게 아니니 아시아계 여성인 이 딜러도 팁을 못 받아서 울상이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다. 한두 번도 아니고 딜러가 연속 네 판을 21점 또는 20점을 기록해 돈을 쓸어갔다.

페칭가 부족의 내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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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노 내부는 촬영이 금지돼 있다. 키투와 카지노에서 몰래 찍다 보니 초점이 흔들렸다. 인생역전의 허황된 꿈을 상징하는 듯해서 실었다 ⓒ 홍은택

그렇게 쓸어간 돈으로 페칭가 부족은 잘 산다. 마치 펑펑 나오는 석유로 전국민이 정부의 보조를 받는 쿠웨이트처럼 페칭가 부족에 속하는 1460명의 인디언들은 한 가구당 연간 12만 달러(1억4천만원 상당)에 가까운 보조금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돈이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페칭가 부족은 최근 130명이 부족민 자격을 박탈했다. 한 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어느 날 투표해서 마을에서 쫓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이들의 조상이 페칭가의 순수 혈통이 아니라는 것.

2000년 인구 센서스에서 410만 명이 인디언 또는 다른 인종과 피가 섞인 인디언이라고 답했다. 이중 순수 인디언이라고 답한 사람은 250만 명밖에 안 된다. 보통은 타 인종의 피가 섞여 있어도 본인이 인디언이라고 자처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페칭가 부족처럼 카지노로 떼돈을 벌게 된 몇몇 부족의 경우에는 얘기가 다르다. 부족민 자격을 얻으면 평생이 보장된다. 신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에 따르면 페칭가 부족의 경우 카지노가 설립되기 전에는 연간 10명이었던 부족민 자격 신청자가 최근에는 450명으로 급증했다. 아버지가 거액의 유산을 남기자 그 아버지의 숨겨놓은 자식이라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과 같다. 페칭가는 등록위원회를 구성해 면밀히 조사하는데 조사 범위를 기존의 부족민에까지 확대하면서 분규가 벌어졌다.

존 고메스(John Gomes)는 페칭가의 추장이던 파블로 애피시(Pablo Apish)의 손녀 딸 매뉴엘라 미란다(Manuela Miranda)의 후손이다. 그리고 95년에 카지노가 생기기 전부터 25년간 페칭가에서 살아왔는데 추방명령을 받은 130명에 끼었다. 위원회는 고메스의 조상인 미란다가 페칭가 부족의 피를 절반만 갖고 있고 또 페칭가와의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고메스의 부족민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위원회의 몇몇 위원들은 과거에 가족 형제처럼 지내던 사람들이다.

빈 주머니, 허황된 꿈

고메스처럼 미란다의 후손이어서 자격을 박탈당한 부족민들이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 소송을 걸면서 인디언 부족 내부의 일이 바깥으로 알려졌다. 부족 최고 기관인 부족위원회(Tribe Council)의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를 지켜본 이 지역의 신문 <프레스 엔더프라이즈(Press-Enterprise)>의 팀 오릴리(Tim O’leary) 기자는 "더 이상 한 부족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운, 차가운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초보자들이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테이블 게임이라던 블랙 잭은 슬롯 머신보다 더 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변변한 반등도 없이 100달러가 나갔다. 열 받아서 지갑 안에 있던 몇 십 달러까지 탈탈 털어서 마지막 뒤집기를 시도했지만 무위였다. 함께 게임을 한 친지들도 모두 털렸다.

그렇게 뜻하지 않은 일주일 간의 카지노 숙박을 마치고 나왔을 때 현금이라고는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몇 푼뿐이었다. 마음도 허황해서 힘없이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사방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페칭가 부족은 23층짜리 카지노와 호텔 그리고 골프장을 건설하고 있는 중이다. 공사비가 수천억 원이 든다고 하는데 은행과 투자금융회사들이 너도나도 돈을 대겠다고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그 많은 원금을 회수하려면 얼마나 많은 꿈들이 허공에 흩어져야 하는 것일까. 카지노가 과연 세수와 고용창출의 지속 가능한 산업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남의 삶을 날려버리면서 버는 돈으로 얼마나 행복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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