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을 응급실에서 보낸 사연

호되게 당한 추석 시집살이

등록 2004.09.29 18:43수정 2004.09.3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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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자네는 혼자서 다 해야 되니까 잘 봐둬야 해.”


남편의 큰 집에서 명절이며 기제사를 지낼 때마다 연세가 친정 엄마 정도인 사촌 큰 형님은 갓 시집온 나를 불러서 일일이 일러주셨다. 남편의 사촌들은 7남매이기 때문에 며느리만 해도 다섯이었지만 남편은 외아들이라서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 모든 책임과 의무는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노릇이었다.

막내 며느리조차 시집 온 지 10년이 넘어 요령이 생길 대로 생긴 큰 집의 다섯 며느리들의 틈바구니에서 작은 집의 새댁인 나는 명절과 기제사 전날이면 가장 먼저 큰 집에 도착해 전을 부치고 큰 형님의 일을 도왔다. 몸은 고단했고 입덧으로 기름 냄새가 비위를 거스른 적도 있었지만 그저 사람 사는 것 같은 분위기가 좋아서 큰댁 식구들과 어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과 3년 만에 나는 그런 분위기를 즐길 수 없게 됐다.

큰집의 다섯 동서들 속에 섞여서 여전히 명절을 쇠고 있다면 결혼 7 년 차에 접어 든 나도 지금쯤은 요령이 생겨서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전을 부치는 일 따위는 세살 아래 큰 질부에게 슬쩍 떠다밀며 입으로만 한몫 거들고 있을 것이다.

결혼하고 3년째 되는 해의 일이었다. 그 때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첫번째 추석이 당도해 있었다. 그 해에는 우리 집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고 둘째 아이가 태어났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를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추석은 코앞에 다가왔고 그 해부터는 나 혼자서 차례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하루 하루 가슴이 무거웠다. 거기에 시어머니께서는 너희끼리 차례를 지내라고 미리 통보하셨다. 시골로 이사를 결정한 우리를 못마땅해 하는 심기를 시위를 하듯 드러내신 것이다.


온 동네에 자가용들이 넘쳐나고 오랜만에 활기가 가득한 시골 마을이 아직은 낯선 섬 같았던 나는 남편과 둘이 앉아서 송편을 만들고 전을 부쳐서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첫 번째 추석 차례를 지냈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에 홀로 남은 어머님의 아파트로 향했다.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뭐 하러 왔냐?”


우리가 들어서자 다소 오기에 찬 표정으로 맞이하는 어머님께 나는 주눅이 들어 버렸다.

큰집으로부터 독립해 처음 차린 차례상이라 신경을 써서 멋을 부릴 대로 부린 삼색 송편과 알록달록 일곱 가지 전 등을 펼쳐 놓았지만 시어머니는 거들떠 보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겨우 잠자리에 누웠는데 배가 살살 아파오더니 가슴에서 울컥 토악질이 올라왔고 아랫배에서는 신호음이 울렸다. 처음 제사상을 차리느라 너무 긴장하고 시어머님의 냉대에 기가 죽었던 나는 그만 급체를 한 것이다.

그렇게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리던 나는 축 늘어져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119 차 안이었는데 응급실로 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추석날을 병원 응급실에서 보냈다. 피투성이인 사람들의 악다구니 속에 다섯 시간 동안 링거를 맞으며 밤을 하얗게 새웠다.

“내가 올 명절부터는 단단히 시집살이 한번 시켜보려고 별렀는데 무서운 시에미 노릇은커녕 죽 끓여서 며느리 병수발부터 하게 하는 걸 보니 너나 나나 시집살이 시키고 말고 할 팔자가 아닌가 보다. 밤새 잠도 못자고 먹은 거 위로 아래로 다 쏟아냈으니 후딱 한 그릇 비우고 좀 쉬어라.”

어머니께서는 응급실에서 돌아와 기진맥진해 누워 있는 내 머리 맡에 흰 죽을 끓여 놓으셨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서 너한테 시집살이를 시켜보겠냐? 송편은 잘 만들었더라….”

방울방울 떨어지던 눈물과 함께 그 멀건 흰 죽을 먹던 추석도 벌써 4년이 지났다. 하지만 매년 추석이 되면 그 때 그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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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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