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임인수 목사가 발행한 <새암의 소리>김갑수
이때문일까, 인쇄소에서 경찰서에 신고했는지 출동한 형사들이 찾아와 교회를 방문했다. 겁을 주며 신문 제작 중단을 요구했고, 임 목사는 "잡혀갈까봐 겁도 났고, 시작 단계에 있는 교회가 문을 닫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가족의 평안을 위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의 폐간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미 신문은 그들의 손에 의해 절단돼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신문을 다시 만들어 배포했다. 임 목사는 그 이유에 대해 "군사 정권의 불의가 너무도 컸고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를 외쳐 보아야겠다는 뜨거움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임 목사는 1984년, 천안ㆍ아산 인권선교회에 참여했다. 여기서 감리교, 장로교의 목사들 그리고 성공회 신부와 함께 인권선교의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졌고, 87년에는 천안ㆍ아산지역의 6ㆍ10항쟁을 계획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 | 새암교회의 87년 7월 어느 날 주보에 실린 글 | | | "나라 일을 맡은 이들" | | | | 이 나라의 불행의 요인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한 가지는 불의한 정권자들의 불의한 비도덕적 통치수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민주쟁취', '호헌철폐', '군부퇴진', '집회자유', '언론자유', '직선개헌', '애국자들의 석방' 등을 외쳐왔습니다. 금년에 들어서서 이러한 외침은 큰 함성이 되어 불의한 정권자들의 귀를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과 폭력 수단 이외에는 별 방안이 없는 무능한 현 집권자들은 엄청난 폭력과 속임과 최루탄을 사용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6월 29일 아침에 노태우씨는 그들의 통치를 반대하며 그들의 퇴진을 요구하던 이들의 주장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우리 모두를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갑자기 회개를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그 간 행해온 큰 죄에 대하여 자백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이번 정변에 대하여 어떤 나라에서 말하기를 '하늘의 기적'이라고 했으며, 또 어떤 나라에서는 '한국인들의 승리'라고 평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만, 이번의 이 정치변화는 참으로 하나님이 한국국민들을 위해 베푸신 기적이요 국민들의 승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국민들의 중요한 요구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시급한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행악자들이 퇴진하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강탈하고 국민들에게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해 온 자들이라면, 응당 그들은 국민 앞에서 그들의 죄목들을 나열하면서 자백하고, 감옥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이 그들의 자리에 그대로 앉아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무고한 국민들과 애국자들을 협박하고 때리고 고문하고 상처 나게 하고 죄인이라고 낙인찍어 감옥에 잡아넣거나 죽도록 한 자들이 자백도, 회개도, 퇴진도 안했는데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로 여길 어리석은 이들이 이제는 별로 없을 줄로 믿습니다. | | | | |
빛바랜 '새암의 소리' 합본을 펼쳐보다가 발견한 타자체로 씌어진 글이다. 한 구절 한 구절 읽다보면서 그 시대의 상황을 바라보는 임 목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아무리 글을 줄이려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자도 모태신앙인지라 목사님들의 설교를 수백 번은 들었지만, 정권에 대해 이렇게 날카롭게 비판하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엔 그런 비판을 한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 당시엔 어지간한(?) 정신으론 불가능해 보인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은 임 목사와 관련된 일들 때문에 형사들이 자주 찾아왔고 다소 어수선한 동네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임 목사가 인권선교위원회에 속하여 반정부투쟁에 힘을 쓴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임 목사를 좌경용공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87년 당시, 15명 정도밖에 안 되는 교인 중 절반이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 생겼다.
새암교회 사택에서 만난 임인수 목사는 오랜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